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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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사회
10년 전 『피로사회』로 한국에서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던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철학자 한병철의 또 하나의 논쟁적 저작.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고 말하는 그는 최신작 『불안사회』에서 이 시대의 질병을 ‘불안’이라 진단하며 불안이 잠식한 사회에서 끊어져 버린 연대와 만연한 혐오에 경종을 울린다. 불안을 체제적으로 사용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희망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이 책은 짙은 불확실성과 깊은 무기력에 빠진 현대인의
저자
한병철
출판
다산초당
출판일
2024.11.28

 

 

 


들어가며 

 

희망 대신 불안으로 가득 찬 현대 사회 

 

다중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늘 불안에 찬 눈으로 삭막한 미래를 곁눈질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희망은 없어 보인다.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재앙에서 다음 재앙으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간다. 요란한 문제 해결과 위기관리법 앞에서 삶은 생존의 삶으로 축소된다. 

 

만연해진 불안의 분위기는 희망의 싹을 질식시킨다. 불안으로 인해 우울한 기분이 널리 확산된다. 불안과 르상티망은 대중을 우파 포퓰리즘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혐오를 선동한다. 연대와 친절과 공감은 서서히 붕괴된다. 증가하는 불안과 커지는 르상티망은 사회전체를 난폭하게 만든다. 그러다 종국에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민주주의는 불안에 굴복하면 무너지게 됩니다. - 오바마 연설 중

 

불안과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화해와 대화의 분위기 속에서 그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자기 의견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는 사람은 민주 시민이라고 할 수 없다. 

 

불안은 훌륭한 지배 도구다.

불안을 공공연히 부추기는 혐오 발언이나 이른바 shitstorm은 자유로운 의견 표출을 가로막는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는 사유에 대한 불안마저 가지고 있다. 사유할 용기가 사라져 가는 듯하다. 사유는 ‘완전히 다른 것’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불안의 분위기 속에서는 같은 것들끼리 순환한다. 대세 순응주의가 만연해진다. 불안은 ‘다른 것’으로의 접근을 차단한다. 

 

불안이 지배하는 곳에 자유란 없다. 불안과 자유는 상호 배타적이다. 불안은 전체를 감옥, 수용소로 만들어 버린다. 불안은 이정표를 세우지 않으면서, 오로지 경고 표시판을 해준다. (그래서 의미와 방향을 찾게 해주는 희망이 필요함)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들 삶의 진짜 미래를 빼앗는다.

(예) 기후 불안도 정당한 불안이며 부정 불가

(문제) 질병처럼 창궐하는 불안의 기후

문제는 펜데믹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불안의 펜데믹이다. (라임….!)

불안을 유발하는 사회운동은 결코 미래지향적 운동이라 볼 수 없다. 어떠한 행위를 할 때는 의미의 지평이 필요하다. 행위는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희망은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의미가 많기에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불안은 말로 표현될 수 없고 이야기가 될 수 없다. 

 

희망을 이야기해보자.

 

희망 어원사전 : 앞으로 몸을 굽힘으로써 더 멀리, 더 정확히 보려고 하는 것

verhoffen 독일어 희망하다 : <사냥 용어> 가만히 선 채로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고, 낌새를 읽는다

가장 내면에 자리한 희망은 깊은 절망에서 눈을 뜸. 

희망의 정령 엘피스 : 밤의 여인 닉스의 자식 (닉스의 형제 : 심연의 신 타르타로스, 암흑의 신 에레보스, 사랑의 신 에로스) 

희망은 이렇게 변증법적 모습을 띄고 있음. 

즉 절망이 지닌 ‘부정성’의 방향은 희망을 향해 있다. 

 

다만 이뿐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이라. - 사도 바울

희망은 쏟아져 내리는 격렬한 삶의 물살 위로 떠오르는 무지개와 같다. - 니체 

 

그러나 희망적 사유는 낙관적 사유와 다르다. 

낙관주의에는 부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 완전한 긍정이 낙관주의의 본질.

낙관주의자에게 시간은 닫혀 있다. 낙관주의자는 닫혀 있지 않은 미래, 가능성의 여지로서의 미래를 알지 못함. 명랑한 기분에 예속되어 있음. 결단이 필요 없음.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그래서 어딘가로 굳이 향하여 가지 않는 낙관주의와 대조적으로 희망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움직임이다. 행위하는 희망에는 적극적 참여라는 특징이 있음.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는 가능성을 보는 눈이 멀어있다. 일의 흐름에 뜻밖의 변화를줄 수도 있을 어떠한 사건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환상도, ‘한 번도 거기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열망도 알지 못한다. 반면 희망하는 자는 ’눈앞의 나쁜 것‘ 너머로 향하는 가능성을 상정한다. 희망은 감옥같이 닫혀 있는 시간을 깨고 나올 힘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긍정성 숭배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 고통의 책임이 사회가 아닌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고통이 사회적으로 매개된다는 사실은 무시한다.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만, 자기의 행복, 자기의 안녕에만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희망은 주어진 것, 눈앞에 있는 것 너머로 우리를 고양하는 정신의 태도이자 기분이다. 희망하는 것은 ’현실에 신뢰를 갖는 것‘이고 믿음을 부여하는 것이다. 

 

부정성이 없으면 강도의 차이도 없다. 오늘날 경험이 부족해지게 만드는, 도처에 만연한 ’좋아요‘에는 부정적 측면이 없다. ’좋아요‘는 소비의 기본 공식이다. 부정적 성질이나 그로 인한 강도의 차이는 소비 행위에 들어 있지 않다. 희망도 하나의 강도에 해당한다. 희망은 내면에 있는 영혼의 기도, 즉 절망의 부정성을 마주 했을 때 눈뜨는 고난의 열정이다. 

 

불안의 체제 속에서 우리는 자기착취를 하고 고립되어 간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불안의 체제다. 사람들을 서로에게서 떼어 내, 각자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도록 했다. 총체적 경쟁과 늘어나는 성과 강박은 공동체를 침식시킨다. 자기애적 고립은 외로움과 불안을 낳는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점점 불안으로 채워진다. 실패에 대한 불안,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충족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 뒤따르지 못하거나 도태될 거라는 불안. 그러나 고루 퍼진 이러한 불안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생산성을 높여 준다.

 

자유롭다는 것은 곧 어떠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반대로 자유가 강박을 일으킨다. 이 강박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다. 성과 강박, 최적화 강박은 자유가 만들어 낸 강박이다. 자유와 강박은 한 몸이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창의적이어야 하고, 높은 성과를 내야 하고, 고유해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예속 시킨다. 

 

다양하게 요구되는 창의성이야말로 철저한 다른 것,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의 발생을 막는다.

창의성은 신자유주의적 장치로 자리 잡았으며 모든 장치가 그러하듯 강박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창의성 장치가 적용된 ‘새로운’ 것은 결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동일한 것만을 반복 생산한다. 그래서 생산과 소비를 넘어서는 다른 삶의 형태를 가능케 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말하는 새로운 것이란 결국 소비의 형태에 불과하다. 

 

자기 창조도, 창의적 자기실현도 마찬가지로 압박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최적화하고 실현한다는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죽도록 착취한다. 이러한 내부의 강박은 불안을 가와하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자기 창조는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는 자기 착취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사람들의 고립을 심화한다. 소셜미디어는 역설적으로 소셜한 것을 해체하여 결국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결속되어 있지는 않으면서도그 어느 때보다도 잘 연결되어 있다. 관계 맺기는 연락으로 대체된다. 거기에 접촉이란 없다. 우리는 접촉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타자가 ‘너’에서 ‘그것’, 즉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거나 나의 자아를 확인하는 목적에 지나지 않는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할 때 타자와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그 힘을 잃고 약해진다. 반사된 나 자신을 보기 위한 역할만을 부여받은 타자는 그의 다름, 그의 타자성을 상실하게 된다. 연결과 접촉의 부재를 야기하는 사회의 늘어나는 자기애는 불안을 강화한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희망은 우리를 고립시키지 않고 연결하며 공동체화 한다는 점에서 불안의 반대개념이자 ‘반대 기분’이다. 나는 우리를 위해 너를 희망한다. - 가브리엘 마르셀.(와…. 진짜) 

 

희망은 사람을 고립시키지 않는다. 희망은 화해하고 연결하고 연합한다. 불안은 신뢰나 공동체와도, 친밀함이나 접촉과도 조화롭지 못하다. 불안은 소외, 외로움, 고립, 상실, 무력감, 불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희망은 미덕처럼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안의 기후가 지배적인 곳에서 희망은 싹틀 수 없다. 불안이 희망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안의 기후, 불안의 체제에 맞서는 희망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희망의 정치가 필요하다. 

 

다른, 더 나은 세상을 희망하는 행위 안에서만 비로소 혁명 가능성이 생겨난다. 오늘날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희망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불안 속에 고집스럽게 머물기 때문이며, 삶이 ‘살아남기’로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동일성의 지옥이 되었다. 우울은 인류의 모든 희망을 앗아 간다. 우울하고 탈진한 미래는 동일한 것의 무한한 반복이다. 희망은 우리를 우울과 탈진한 미래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약동이요, 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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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행위

 

소비가 총체화되는 곳에서 시간은 필요와 그 필요의 충족이라는 영속적인 현재로 축소된다. 희망은 자본주의적 용어에 속하는 말이 아니다. 희망하는 이는 소비하지 않는다. 

 

내일 없이, 미래 없이 자기 자신으로만 축소된 현재는 새로운 시각을 결의하는 행위가 지닌 시간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한 현재는 주어진 것의 단순한 최적화, 심지어는 ‘눈앞에 있는 잘못된’ 것의 단순한 최적화로 전락한다. 의미를 부여하는 지평 없이 행위하기란 불가능하다. 

 

살아감이 곧 희망함이라고. (눈물)

 

수동적 희망은 실로 힘없는 단순한 소원에 불과하다. 행동하는 강한 희망은 인간이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희망은 기분, 그 중에서도 인간 실존을 끊임없이 규정하는 근본기분이다. 

기분은 순식간에 사로잡힌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기분은 우리를 기습하고, 사로잡고, 변화시킨다. 

 

인간은 희망함으로써 눈앞에 존재하는 나쁜 것들을 초월한다.

희망은 큰 온화함, 청량한 태연함, 깊은 친절함을 동반한다. 희망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희망한다는 것은 앞으로 도래할 것에 내부적으로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다. 

사유와 행위도 희망이 가진 이러한 관조적 차원, 즉 수용하고, 예견하고, 기다리고, 묵허하고, 일이 되어 가는 것을 그대로 두는 차원을 지니고 있다. 단순한 행동에는 신성함이 없다. 가장 높은 차원의 활동은 그 내면의 핵심에 무위의 차원을 지니고 있다. 

 

‘활동하는 희망’은 미래를 계획하고 미래를 향한 낮의 꿈으로 그 닻을 현실에 내리고 있다. 활동하는 희망은 눈앞에 나쁜 것에 만족하기를 거부한다. 활동하는 희망은 낮의 꿈을 꾸며, 행위하기로 결심한다. 낮의 꿈은 결국 행위의 꿈이다. 행위의 꿈은 보다 나은새로운 삶을 위해 눈앞에 나쁜 것을 없애는 꿈이다. 

 

밤의 꿈을 꾸는 사람은 자신만의 보물과 함께 홀로 존재하는 반면, 낮의 꿈을 꾸는 사람의 자아는 타인의 자아와 연결될 수 있다. 

 

낮의 꿈은 세상을 개선할 행위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의 차원을 지니고 있다. 낮의 꿈을 꾸는 사람만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밤의 꿈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과 달리, 낮의 꿈은 유토피아적 잠재력과 정치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혁명가들은 낮의 꿈을 꾼다. 혁명가들은 앞을 향한 꿈을, 그것도 함께 꾼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꿈은 강렬한 희망에서 유발된 낮의 꿈이다. 

 

행위할 수 있어야 빌소 자동적인 생의 흐름에서 멈춰설 수 없다. 새로 시작할 힘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에 처한 모든 것을 그저 반복하며 죽음으로 내달려 갈’ 숙명에 처해 있을 뿐이다. 

 

희망에는 깨어짐이 내재해 있다. 깨어짐이 지닌 부정적 성격은 희망을 만들고 영혼을 부여한다. 희망의 밝은 빛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깊은 어둠을 먹고 산다. 

 

가능하지 않은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의 긴장은 믿음의 행위가 되어 미래를 열고 언어를 지속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삶을 가능하게 한다. 

잃음과 잃지 않음은 서로를 강화한다. 

결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희망의 특징이다. 

희망은 삶에 태연과 확신을 부여한다. 

 

오늘날, 우리가 속한 나르시시즘적 공동체에는 이 피가 자아의 궁핍한 순환 속에 갇혀 있다. 더 이상 세상으로 흘러 나가지 않는다. 세상 없이, 우리는 그저 자신의 자아 안에서 순환한다. 반면에 희망에는 폭이 존재한다. 희망은 ’우리‘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단순한 소원 또는 기대와 희망의 차이다. 

 

희망은 어떤 것이 잘될 거라는 확신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되는지와는 상관없이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확신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먼것이 사라지고 있다. 그저 소원을 품기만 하고, 희망할 줄은 모른다. 먼 것 없이는 가까운 것도 없다. 먼 것과 가까운 것은 상호 조건적이다. 가까운 것은 거리 없음이 아니다. 가까운 것이 있다는 것은 먼 것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먼 것이 모두 사라진 곳에서는 가까운 것도 사라져간다. 가까운 것이 먼 것을 깊어지게 한다.

 

디지털 과잉 소통은 우리를 말이 없게 만든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시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정보만을 소비하는 사람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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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인식

 

지능 : 여럿 사이에서 고르기에서 유래한 말. 

진정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은 지능적이지 않다.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하므로)

질 들뢰즈 : 사유하는 사람은 바보 / 바보가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꼬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의 근보적인 단절을 할 수 있으며, 기존에 존재했던 것을 떠나 앞으로 도래할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바보만이 희망할 수 있다. 

 

인식을 추구하는 믿음 -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안셀무스 칸투아리엔시스)

인식을 추구하는 희망 - 나는 이해하기 위해 희망한다. (위르겐 몰트만)

 

희망 없이 우리는 기존의 것 또는 나쁜 눈앞의 것에 갇힌다. 희망만이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어타게 하는 의미 있는 행위를 만들어 낸다. 

 

희망은 현존하는 것의 로직을 신경 쓰지 않는다. 희망은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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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형태로서의 희망 

 

불안에 처해 있을 때, 현존재가 비로소 세인에 맞서 자신의 가장 고유한 ‘자기‘를 붙잡고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할 수 있음‘을 실현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 바로 존재와 시간의 핵심이다. (네?)

 

희망은 ’자기‘ 안에서 힘을 만들지 않는다. 희망의 중심이 ’자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하는 이는 타인을 향해 나아간다. 희망하는 이는 ’자기‘를 넘어서는 일을 신뢰한다. 따라서 희망은 믿음에 가깝다.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도 나를 세우고 심연 속에서 서 있을 힘을 주는 것은 초월성을 지닌 타자의 존재다. 

 

희망하거나 믿거나 사랑하는 이는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주며 ‘자기’의 내부에 머무는 것을 초월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사유에 사랑과 믿음은 없다. 거기에는 타인의 차원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는 사랑하지도, 희망하지도 못한다. (하이데거 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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