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은 자신의 병에 항상 자부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 병의 위허함 때문에 가족들이 자신을 더욱더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대부분의 병든 아이가 그렇듯이 조숙하였으며, 애정이나 적대감에는 특이하게도 신경과민적인 열정을 보여 주었다.
그의 말투에는 광적이 불꽃이 엿보였다. 한편 그의 서투름은 자신의 열정을 간신히 억제하느라 일어나는 불안이 그 원인인 것 같았다.
악의는 명확한 결정을 하도록 그에게 통찰력을 부여했다.
미움은 어른아이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두 사람보다 강력했다.
그는 말 뒤에는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말이라는 것은, 텅 빈 채로 부풀어 오른, 단지 색깔만 화려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삶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까지 아이는 그녀의 삶 다음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장식, 장난감, 사랑, 믿음 그리고 때로는 하나의 짐이었으며, 그녀의 삶이라는 박자를 타고 움직이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오늘 처음으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의지에 반항하는 것이었다. 미움 같은 그 무엇이 이제 그녀의 아이에 대한 기억 속에 뒤섞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아이는 한 번도 생각지 않은 '삶'이라는 현실이 있고, 그가 한 번도 생각지 않은 '삶의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가 손에 쥐고 장난치곤 했던 많은 사물들이 어떤 고유의 가치, 특별한 의미를 지녔음을 느끼게 되었다. 한 시간 전에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그는 이제 수천의 비밀들과 의문들을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나쳐 보냈음을 느꼈다. 그리고 빈약한 지혜가 삶의 첫 번째 단계에서 비틀거리며 세상에 다가가고 있음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유복한 환경에서 살아왔으며, 자신의 삶 주위가 그의 시선이 한 번도 닿아 본 적이 없는 어두움의 심연 속으로 가ㅏ파르게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직업과 운명이라는 것이 있으며, 삶의 주위에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단 한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비밀이 있음을 갑자기 알게 되었다. 에드거는 혼자 있게 된 한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 좁은 기차 칸에서 창문을 통해 밖의 많은 것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명치 않은 불안감 속에서도, 아직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가 조용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의 다양함에 대한 경이로움이었다. 그는 불안감과 비겁함으로 도피하고 있었고 그것을 스스로 매 순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제까지 그냥 지나쳐 버렸던 현실적인 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체험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이제까지는 세상이 그에게 비밀이었던 것처럼, 엄마와 아빠에게 그 스스로가 비밀이 되었다. 그는 다른 시선을 지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최초로 모든 현실적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물에서 베일이 벗겨져, 그 의도의 내면이 그리고 행위의 비밀스러운 핵심이 그에게 모두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집들이 옆으로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자일지 혹은 가난한 사람일지, 행복할지 혹은 불행할지 아니면 그들이 자신처럼 모든 것을 알려는 그런 동경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일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자신처럼 이제까지 물건들하고만 놀던 아이들이 그곳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철도직원들이 이제까지처럼 단순한 인형이나 죽은 장난감, 아무 상관없는 우연으로 세워진 사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아가 삶에 대한 그들의 투쟁이 그들의 운명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그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했다. 많은 화려하고 풍부한 것들을. 최근에 모든 고통들이 처음으로 겪은 체험이 주는 강력한 감정 속에 사라져 갔다. 그는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비밀스러운 예감으로 행복했다. 밖에서는 점점 더 저물어 가는 밤의 나무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어둠의 풍요로움을 알게 된 이후, 삶의 초조함 따위는 모두 사라졌다. 그는 처음으로 오늘 벌거벗은 것을 본 것 같았다. 그것은 어린시절의 수천의 거짓으로 은폐되지 않고, 완전히 육감적이고 위험한 아름다운 속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는 자신의 일상이 다양한 고통과 즐거움들을 교차시키면서 압박감을 줄 수도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아직도 수많은 날들이 그의 앞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 비밀을 벗겨 내야 하는 총체적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그를 행복하게 했다. 삶에는 다양성이 있다는 예감이 그에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인간의 존재를 이해하게 되어, 비록 그들이 적대적으로 보일 때가 있을지라도, 결국 서로를 필요로 하고 그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대단히 달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직은 증오심을 가지고 그 어떤 것, 어떤 사람을 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또한 지나간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았다. 유혹자이며 가장 냉혹한 적이었던 남작에게도 그는 오히려 감사하다는 새로운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감정들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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