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중성 부력이 스쿠버 다이빙의 기본이라고 했다.
"중성 부력에서는 무중력 상태처럼 자유롭지. 아빠는 도담이가 중성 부력에서처럼 평온하고 자유롭게 살면 좋겠다."
너희 아빠 멋있는 분 같아.
내가 생각해도 좀 멋있긴 해. 사람을 구하는 건 언제나 옳은 일이잖아.
너 소용돌이에서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도담이 해솔을 보며 물었다.
수면에서 나오려 하지 말고 숨 참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빠져나와야 돼.
(아이를 구하고 아빠는 빠져 죽는 사건에 대해)
그건 과연 위대한 사랑일까? 이성적은 판단을 내릴 새도 없는 즉각적인 반응이 정말 용기와 관련 있는 걸까? 자기 자식이니까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 같은 거 아닐까? 그럼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을 위해 뛰어드는 경우는 뭐지? 물에 빠져 위태로운 강아지나 고양이를 위해서라면? 뛰어드는 사람도 있을 거야. 하지만 물에 빠진 게 토끼나 닭이라면? 만약 평생 집에 소홀하던 사람이 물에 빠진 가족을 위해 뛰어들면 그걸로 사랑이 증명되는 걸까...
사람들이 숭고하다며 가치를 부여하는 일들은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벌어지거나 무모함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나중에 의미가 부여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솔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부모를 바라보며)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해.
(도담의 엄마 정미)
너희는 악연이야. 얽혀서 좋을 게 없어. 절대로 연락하지 마.
나는 저들에게 아주 불행한 사람으로 기억되겠지. 그들의 삶이 힘들 때마다 적어도 내게는 저렇게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잖아, 나는 행복한 거야, 라고 위안 삼을 만한 불행의 표본이 되었겠지.
사람들은 그들이 기대한 만큼 비극을 겪은 사람이 충분히 망가지지 않으면 일부러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 희진의 말처럼 난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것은 자신에게 집중할 일 없는 사람들의 가벼운 유흥에 불과했다.
도담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몸을 떨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여름이 이제는 오지 않았으면 했다.
(할머니)
집에 누워만 있으라고? 가만히 있으면 그게 식물이지. 나무가 되는 건 나 죽으면 하라 그래라. 살아 있으면 움직여야지.
(대학생이 된 후)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그곳으로 자신의 밝은 모습이 전부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에게 반하지는 않았지만 도담은 혼자 외로웠고 이 외로움을 틀어막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네 어두운 그늘까지 사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상대방의 지옥을 짊어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연애라는 건 상대방이라는 책을 읽는 거라고, 그렇게 두 배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거라고, 태준은 말한 적이 있었다. 도담은 자신이 펼치고 싶지 않은 책, 끝까지 읽고 싶지 않은 책처럼 느껴졌다. 전부 말뿐이었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은 태준에게 자신이 그토록 상처를 받은 게 놀라웠다.
도담은 다짐했다. 외롭지 않아야 한다. 외로우면 약해지고 쉽게 빠질 수 있다. 주변에 사람을 두고 혼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얄팍하더라도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한다.
상처 입은 사람의 냄새는 애써 덮고 감추어도 눈빛에서, 걸음걸이에서,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도담이 외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남자들은 어디선가 나타나 접근했다. 시체를 뜯어 먹으려고 강바닥에 숨어 있다 모여드는 다슬기처럼.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어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신 도담은 냉소에 빠졌다. 결국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소통보다 침묵을 더 신뢰했다. 심각하지 않고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었다. 자해와 같은 만남들이 이어졋고 외로움은 커져만 갔다.
누가 사랑이라는 치사한 말을 발명했을까. 자신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두글자로 퉁치는 것처럼, 사기처럼, 기만처럼 느껴졌다. 사랑 노래 가사를 들으면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해솔이 떠오르는 것도 싫었다. 사랑이면 다 되는 걸까.
예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양성 부력의 세계에 살고 있는 듯했다. 반면 도담은 지금 자신이 무거운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계속 가라앉는 음성 부력 상태인 것 같았다.
도담은 매순간 분열했다.
늘 앞을 예측하고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 파묻혀 자신의 이야기를 덮고 싶었다. 3자의 눈으로 멀리서 바라보면 고통은 조금은 견딜 만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무경)
"실제 삶에서 우리는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극 중 등장인물은 존재 이유가 명확하잖아. 그래서 나는 이야기가 좋아."
둘은 서로의 존재가 아팠다. 서로의 눈물을 핥고 흉터를 핥았다.
내 인생을 낭비 없이 백 프로 살고 싶어. 해솔이 말했다.
도담은 불행의 크기를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양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비교했다. 도담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가진 불행이 가장 크고 가장 값졌다.
도담에게는 자기 인생에 일어났던 불행한 일을, 매 순간의 행복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심리가 있었다.
분노는 그 분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더욱 쉽게 뿜어져 나온다. 상처도 아무도 모르는 상처보다 그 상처의 존재를 아는 사람 앞에서 더 아프다.
해솔의 목소리에 물기가 있었다. 서러운 얼굴에 눈이 붉었다.
헤어져. 아무도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른 말 들어.
네가 사랑해라고 하는 말이 이젠 미안해라고 들려.
네가 떠나면, 그러면 나는 완전히 혼자잖아.
도망가지 마. 너도 책임이 있잖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6년 후)
(승주)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이별을 받아들이며 사는지 모르겠어요. 계속 이별하며 사는 게 현대인들 우울의 원인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가장 꾸밈없는 모습을 ㅠ보이고 내밀했던 친구를 잃고서 살아간다는 게. 세상에서 자신을 정말 잘 아는 사람을 잃는 거잖아요. 그게 누적되는 거 같아요.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서 잊고 치유되는 것도 있긴 하겠지만 대체되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요.
상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다.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위선, 배신, 폭력에 대해 열을 올리며 이야기했다. 연애와 결혼이라는 형식이 자주 본질을 망친다고도 했다.
"사랑이라는 건 거대한 마케팅 같아요. 제가 보기엔 잘 포장된 욕망과 이기심인데. 자기들 멋대로 핑그빛으로, 하트 모양으로 정하고. 그게 장사가 되니까요. 사과 로고처럼."
"도담씨, 그런 얘기 들어 본 적 없어? 7년인가 지나면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가 교체된대. 10년이면 도담씨 온몸의 세포가 교체된 거야. 그러면 이제 도담 씨도 그 사람도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않을까?"
(해솔을 만나서)
"그게 도취라고 한다면, 나는 깨지 않고 12년을 계속 취해 있었어. 그런 강렬한 도취는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도담아,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어.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고 행복이 낯설어질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있을지 모를 미래에 목매지도 않으면서 진정으로 살고 싶어졌다.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거센 물살을 헤엄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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