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728x90
반응형

 
콜센터의 말
9회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한 이예은 작가의 에세이 『콜센터의 말』이 출간되었다. 5800여 편의 응모작 가운데 이예은의 「일본 콜센터에서 520일」이 보여 주는 생생한 현장감과 담담한 문체는 단연 돋보였다. 초보 상담원으로서 겪은 고충과 콜센터를 덮친 코로나19로 인한 혼란뿐만 아니라 콜센터에서 사용하는 매뉴얼화된 존경어와 겸양어가 실망과 기대, 안도와 우울 같은 생생한 감정들과 대비되며 만들어 내는 묘한 울림이 특히 감동적이다. 이 책은 「일본 콜센터에서 520일」에 고객과의 에피소드와 콜센터 바깥의 이야기들을 추가 집필해 총 23편, 4부 구성으로 엮었다. 2015년 한국에서의 호텔 홍보 일을 그만두고 일본에 살기 시작한 저자는 2020년 1월, 일본 여행사의 콜센터에 입사한다. 한국어를 일본어로, 일본어를 영어와 한국어로 옮기던 이력을 바탕으로 상담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상담원과 고객들 사이 소통의 도구는 전화기 너머로 주고받는 말뿐이다. 도움을 주고 고마움을 전하는 말들은 서로를 보듬고 북돋아 주지만, 때로 고객은 거칠고 무례한 말로 상담원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저자는 이방인의 세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콜센터의 말들을 들여다본다. 그의 시선 아래 ‘유감이지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과드립니다’라는 말들은 색다른 질감과 온도로 떠오르며 새로운 의미를 덧입는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협력해 주세요’ 같은 표현들은 콜센터 바깥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며 힘을 주는 말들이다. 저자가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 적응하면서 만났던 위로와 환대의 말들이기도 하다. 너무 익숙해서 지나쳐 버린 말들을 곱씹는 23편의 글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평범하지만 반짝이는 말들을 새로 얻게 될 것이다.
저자
이예은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22.07.01

 

 

 

상담원 일에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높은 소득을 올리는 이도 분명 있지만. 내가 경험한 콜센터는 각자의 이상적인 경로를 이탈한 사람들이 잠시 흘러 들어왔다 나가는 웅덩이에 가까웠다. 일본에서도 콜센터는 높은 퇴사율과 감정 노동을 상징한다. 

 

"그럼 취소해 버려!" 흔치 않은 고객이었다. 일본에는 속에 감춘 본심인 혼네(本音)’와 표면에 드러나는 태도인 ‘타테마에(建前)’을 구분하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분노를 이토록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몇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내뱉는 고함이 내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못함을 알면서도, 나는 눈앞에 맹수를 만난 작은 초식동물처럼 몸이 얼어붙었다. 막상 통화할 때는 꿋꿋이 매뉴얼에 따라 안내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머리에서 저장하기를 거부했는지 상세한 어휘나 문장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뒤이어 나를 덮친 억울함과 분노도 이제는 희미해졌다. 하지만 공포에 질렸던 육체의 감각만큼은 선명히 각인되어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다. 

 

(흥미로워서 남기는 내용) 

일본 번역사에 길이 남을 일화가 있다.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가 자신이 가르치던 영어 교실에서 한 학생이 I love you를 사랑해라고 번역하자, 일본인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달이 아름답네요."라고 고쳐 주었다는 이야기다. 

 

(고객 입장에서는 문제가 있으니 콜센터에 연락했고, 최소 인력으로 운영되기에 빠르게 연결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애초에 기분이 상한 상태에서 상담원과 연결된다. 그리고 짜증을 내는 고객...!) 

대부분의 고객이 품고 있는, 상담원이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으리라는 기대도 한몫하는 듯하다. 살면서 스치는 인연 중 이토록 불평등한 관계는 많지 않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격언은 서비스업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 만약 공개된 장소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 대화한다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감정을 여과해 표출하지 않을까. 목소리로만 접하던 상담원에게도 표정과 인격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들로, 무례함을 견디는 일은 상담원의 숙명이다. 다행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경험이 쌓이면 어떤 말을 들어도 침착히 업무를 완수할 내공이 길러진다. 상처에 무디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괜찮다고 착각하는 순간에도 몸과 마음은 착실히 병든다. 작은 물방울이 축적되면 거대한 바위도 뚫듯, 매일 시퍼렇게 날 선 말을 들으면서 멀쩡하기는 힘들다. 

 

(외국인과는 대화할 가치를 못 느낀다며 일본인을 바꿔달라고 한 진상을 처리해 준 동료)

"답 없는 인종차별주의자가 한 말은 무시해 버리세요. 같은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네요." 이처럼 단순한 직업의식 이상의 에너지를 기꺼이 나눠준 그 모든 손길이 타지에서 아이가 된 나를 양육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 덕분에 나는 일본에 무사히 적응해 살아갈 수 있었고, 지금은 그때의 나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책 제목이나 노래 가사에 자주 등장하는 일본어 중 ‘아리노마마데(ありのままで)’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따라 하기 쉽고 명랑한 울림을 가진 이 말은 ‘있는 그대로’라는 뜻으로, 현재의 모습이나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세계적인 인기를 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주제곡의 일본어 버전에서 「Let it go」를 대체한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이 표현이 ‘그러려니’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느낀다. 틀림이 아닌 다름의 문제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고 억지로 바꾸려 들지 않는 포용성. 동시에 자신을 바라볼 때 외부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천양지차인 이 마음씨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경제적 여유? (있는 놈이 더 해! 라고 답하는 동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세운 가설에 일치하는 사례를 귀담아듣기 마련이므로, 나는 두 가지 의견 모두 조금은 진실이고 조금은 거짓이라고 본다. 가난해도 속에 우주를 품은 이가 있고, 부자라고 해서 모두 안하무인일 리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부도 빈곤도 대물림되는 세상에 관대함마저 돈에서 나온다면 삶이 너무 불공평하다. 타고난 환경이나 외부적 요인이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워도, 내면의 그릇은 자신의 힘으로 빚을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에필로그 중)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 불완전한 기업이 만든 제품을 불완전한 소비자가 사용하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다시 불완전한 콜센터 상담원이 해결하려 애쓴다. 이 사실이 의도된 잘못을 감싸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조금씩 이해의 폭을 넓힐 이유는 되지 않을까. 당장 콜센터의 상담원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거나 사회적 시선을 변화시키기는 힘들어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이 세상에 누군가를 상처 주려는 말보다 보듬고 북돋아 주려는 말이 더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때로는 회상하는 일조차 버거웠던 기억을 모아 기어코 책 한 권을 완성한 것은, 단지 이 말이 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