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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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 ‘작가들의 작가’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김훈의 신작 장편소설 『하얼빈』이 출간되었다. 『하얼빈』은 김훈이 작가로 활동하는 내내 인생 과업으로 삼아왔던 특별한 작품이다. 작가는 청년 시절부터 안중근의 짧고 강렬했던 생애를 소설로 쓰려는 구상을 품고 있었고, 안중근의 움직임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글로 감당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인간 안중근’을 깊이 이해해나갔다. 그리고 2022년 여름, 치열하고 절박한 집필 끝에 드디어 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하얼빈』에서는 단순하게 요약되기 쉬운 실존 인물의 삶을 역사적 기록보다도 철저한 상상으로 탄탄하게 재구성하는 김훈의 글쓰기 방식이 빛을 발한다. 이러한 서사는 자연스럽게 김훈의 대표작 『칼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데, 『칼의 노래』가 명장으로서 이룩한 업적에 가려졌던 이순신의 요동하는 내면을 묘사했다면 『하얼빈』은 안중근에게 드리워져 있던 영웅의 그늘을 걷어내고 그의 가장 뜨겁고 혼란스러웠을 시간을 현재에 되살려놓는다. 난세를 헤쳐가야 하는 운명을 마주한 미약한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는 김훈의 시선은 『하얼빈』에서 더욱 깊이 있고 오묘한 장면들을 직조해낸다. 소설 안에서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의 물결과 안중근으로 상징되는 청년기의 순수한 열정이 부딪치고, 살인이라는 중죄에 임하는 한 인간의 대의와 윤리가 부딪치며, 안중근이 천주교인으로서 지닌 신앙심과 속세의 인간으로서 지닌 증오심이 부딪친다. 이토록 다양한 층위에서 벌어지는 복합적인 갈등을 날렵하게 다뤄내며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야의 차원을 높이는 이 작품은 김훈의 새로운 대표작으로 소개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저자
김훈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2.08.03

 

도장을 찍어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스스로 넘긴다는 것은 보도 듣지 못한 일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은 국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직함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안중근의 아명은 응칠應七이었는데 안태훈은 어렸을 때부터 밖으로 나도는 아들의 기질을 눌러주느라고 무거울 중重과 뿌리 근根을 써서 중근으로 이름을 바꾸어주었다. 개명은 안중근의 기질을 바꾸지 못했다. 안중근은 밖에서 도모하는 일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김아려金亞麗는 시댁 사내들의 말을 귀동냥해서 남편의 일을 짐작했다. 김아려는 혼인한 지 십 년이 지났음에도 나그네 같은 남편을 어려워했다. 

 

안중근은 열여섯의 나이에 고을 사내들을 이끌고 나서서 마을로 접근하는 동학군을 격퇴했다. 

 

<나중에 아래 위인들에 대해 찾아볼 것>

이강년은 안동에서 이겼고, 백담사, 용소동에서 이겼고, 청풍에서 처형되었다.

열아홉 살 청년 신돌석은 경북의 바닷가 영해에서 백여 명의 민병으로 일어섰다. 신돌석은 부하의 집에 몸을 숨기고 봄을 기다리다가, 배신한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인영이 원주에서 일어서자 수천의 민병들이 모였다. 이인영은 탐학하는 관료배들의 재산을 빼앗아 군자금을 조달했다. 이인영은 경성감옥에서 죽었다.

이인영의 중군장 이은찬은 임진강 일대에서 세력을 이루었다. 배반한 부하들이 군자금을 줄 터이니 서울로 오라고 이은찬을 유인했다. 잠복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이 이은찬을 체포했다. 이은찬은 경성감옥에서 죽었다.

최익현은 국권회복을 위해 우선 임금의 성심을 바르게 할 것을 거듭 상소했다. 최익현은 일흔네 살에 전북 태인에서 봉기했다. 대마로 끌려가서 곡기를 끊고 옥사했다. 

 

이런 소식들이 안씨 문중의 술자리에 모였다. / 사내들의 말은 가깝고 다급했지만, 말 끝난 자리의 허허로움을 다들 알고 있었다. 안중근은 몸속에서 들끓는 말을 느꼈다. 말은 취기와 뒤섞여 아우성쳤다. 안중근은 말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 여기는 이미 이토의 땅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살길을 찾아가겠다. 이것은 벌레나 짐승이나 다 마찬가지다. 이것이 장자의 길이다. 

 

출병 전 안중근은 부하들에게 말했다.

- 우리는 강토를 모두 잃고 어디로 가려는가. 이번에 한 번 싸워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승패와 유불리를 돌아보지 말고 싸워야 한다. 승산이 없다기보다 처음부터 승산을 헤아리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을 대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도주막의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밤에, 안중근은 이토의 육신에 목숨이 붙어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그렇다기보다도, 이토가 애초에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이토의 한 생애의 자취를 모두 소급해서 무화시키는 쪽이지 싶기도 했는데, 그 지우기가 결국 이토의 목숨을 제거하는 일이 되는 것인지는 생각하기가 머뭇거려졌다.

이토의 목숨을 제거하지 않고서, 그것이 세상을 헝클어뜨리는 작동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음의 목적은 살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이 세상에서 이토를 지우고 이토의 작동을 멈춰서 세상을 이토로부터 풀어놓으려면 이토를 살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안중근은 어둠속에서 생각했다. 생각은 어둠의 벽에 부딪혀서 주저앉았다. 생각은 뿌연 덩어리로 엉켜 있었다. 

 

세 발은 많지 않지만, 적지도 않다. 이토는 경호원을 여럿 데리고 있을 테니까 아마도 나는 세 발 이상은 쏘지 못할 것이다. 근접할 수만 있다면 세 발 이상은 필요 없다. 경호원이 많아도 먼저 쏘는 자를 당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총이다.

 

- 이토는 철도를 좋아한다는데, 하얼빈역 철길은 총 맞기 좋은 자리다. 

- 나도 철도를 좋아한다. 쏘기도 좋은 자리다. 

 

새로 산 옷을 싸들고, 안중근은 우덕순을 이발소로 데려갔다.

- 머리를 깎자. 잡힐 때 깔끔한 게 좋겠다. 새 옷도 입고.

- 그렇겠구나. 

/ 오늘 호강하는구나.

 

이토를 조준해서 쏠 때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절망감과 복받침, 그리고 표적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전쟁과 침탈과 학살과 기만의 그림자까지도 끊어버리고 둘째 마디의 적막과 평온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1탄 이후에 벌어지는 소란 속에서 고요한 평정을 유지하고 조준선을 찾아가야 한다. 반동을 몸으로 받아가면서 몸은 다시 평온해질 것이다. 평온해진 내 몸을 총알에 실어서 이토의 몸속으로 박아넣자.  

 

정보를 덧칠하지 말고 날것으로 보고하라. 불온은 고요함 속에 있다. 라고 헌병대장은 훈시했다.

 

조선 팔도는 고요했다. 순종은 그 고요의 바닥이 두려웠는데,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순종은 살길을 생각했다. 조선의 살길과 황실의 살길과 백성의 살길은 겹치고 또 부딪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살길은 슬픔에 있었다. / 순종은 메이지에게 위로의 전문을 보냈다.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통분한 마음이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위로를 보냅니다.) 

 

뮈텔은 안중근의 내면의 영성을 헤아릴 수 없었다. 안중근은 조선의 자식이고 조선의 폐허에 발 디디고 있지만 폐허에 속하지는 않았다. 안중근은 길라잡이로서 믿음직했지만 뮈텔은 안중근에게서 위태로운 어긋남을 느꼈다. 

 

뮈텔이 말했다.

- 조선에 대학교는 가당치 않다. 조선인은 우선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조선인이 학문을 배우면 신심을 해치게 된다. 좋지 않다. 다시는 이런 말을 꺼내지 마라. 

 

하얼빈역 플랫폼은 내가 이토를 쏘기에 알맞은 자리고, 이토가 죽기에 알맞은 자리다. 

...나는 이토가 온 철도를 거슬러 가고 이다. 대련은 이토의 세상이다. 대련은 내가 말하기에 편안한 자리이고 내가 죽기에도 알맞은 자리이다. 

 

도쿄의 한국 황태자 이은은 태사인 이토의 죽음을 애도해서 삼 개월 복을 입고 식음을 간소히 했다. 

 

우덕순 같은 하층의 불량배에게 정치사상이 있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정신의 용력이 있다는 것을 미조부치는 인정할 수 없었고, 그것은 본국 외무성이 이 재판에 요구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미조부치는 우덕순이 저지른 행위의 사실과 우덕순의 사상 사이의 연관을 부정하는 쪽으로 신문의 방향을 정했다. 

 

-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

- 그렇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 

 

... 여기까지 오기는 왔구나. 여기서부터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세상을 향해서 말을 해야 하는구나. 여기서부터 다시 가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여기서부터 사형장까지... 말을 하면서... 안중근은 몸속에서 버둥거리는 말들을 느꼈다. 말들은 탄창 속으로 들어가서 발사되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가 총 밖으로 나와서 긴 대열을 이루며 출령거렸다. 말은 총을 끌고 가려 했고, 총은 말을 뿌리치려 했는데, 안중근은 마음 속에서 말과 총이 끌어안고 우는 환영을 보았다. 법정에서 사형장까지는 멀지 않았으나 말을 거느리고 거기까지 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몸속에서 버둥거리는 말이 하얼빈역에서 쏜 자동권총처럼 방아쇠를 당기는 대로 쏟아져 나온다면 거기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어렵거나 어렵지 않거나 거기까지 가는 길이 멀지는 않다는 것을 안중근은 법정에 들어서면서 확실히 알아다. 

 

-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 그런 원대한 계획이었다면 범행 후 체포 당하지 않으려 했을텐데,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 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국가 앞에서는 종교가 없다.

 

- 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일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재판에서 이토를 죽인 까닭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복이고, 이토가 살아 있을 때 이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저의 불운입니다. 

- 제가 이토를 죽인 일을 뉘우친다면, 제가 이토를 죽이는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만일 이 사업에 실패해서 이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저는 이토를 죽이려는 저의 마음을 뉘우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 이토를 쏠 때, 이토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조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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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한국의 근대는 문명개화의 꿈에 매혹되었고 제국주의의 폭력에 짓밟혔다. 이 문명개화는 곧 서구화였고, 한국인이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미 이룩한 문명은 개화의 추동력에 합류할 수 없었다. 20세기 초의 한반도에서 과거는 미래를 감당할 힘을 상실했고 억압과 ㅜ탈을 위장한 문명개화는 약육강식의 쓰나미로 다가왔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의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 '무직'이며 '포수'인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인간세의 운명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안중근은 말하고 또 말한다. 안중근의 총은 그의 말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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