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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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2019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 작가 박상영의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한국문학에서 이미 중요한 주제가 된 퀴어소설. 그중에서도 저자는 성에 있어 가볍게 보일 수 있는 면모를 오히려 작품의 매력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그 안에 녹록지 않은 사유를 담아냄으로써 단연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단숨에 자리 잡았다.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로 평단과 독자의 사랑을 받은 저자의 이번 작품은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을 비롯해 발표와 동시에 화제가 됐던 4편의 중단편을 모은 연작소설이자 두 번째 소설집이다. 게이 남성인 주인공 ‘나’는 대학 동기인 여성, 재희와 동거한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면서 가깝게 지내다가 재희가 스토커 남자에게 위협받은 사건을 계기로 같이 살게 된 두 사람이 재희의 임신중절수술, 그리고 ‘나’의 연인의 죽음과 작가 등단 등 20대의 큰 사건들을 함께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재희》, 말기 암 투병 중인 엄마를 간병하면서 지내다가 5년 전에 뜨겁게 사랑했던 형의 편지를 받고 다시 마음이 요동치며 과거를 떠올리는 ‘영’의 이야기를 담은 《우럭 한점 우주의 맛》 등 청춘의 사랑과 이별의 행로를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경쾌하게 그려내고, 때로는 밀도 높게 성찰하는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저자
박상영
출판
창비
출판일
2019.06.28

 

재희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단지 내가 그 어두운 도시의 거리에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때문에 알고 있는 누군가와 온 힘을 다해 혀를 섞었다. 

 

(여자들을 험담하는 남자 동기들에게) 쥐좆만 하게 생긴 것들이 허풍 좀 작작 떨라고!  (외친 후 + 게이 소문이 돌아) 앞으로 과에서 친구 만들기는 글렀구나, 뭐 어때 다들 술도 못마시고 재미도 없는데, 하고 자조적인 합리화를 하며 복잡했던 마음을 정리할 때쯤 내 인생에 재희라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었다.

 

재희와 나는 정조 관념이 희박하고, 아니 희박하다 못해 아예 없는 편이며 그런 방면에서는 각자의 세계에서 좀 유명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귀여운) 나는 혼자 있을 때 재희의 펜슬을 들어 눈썹에 빈 곳을 채우거나 팩트의 퍼프를 꺼내 괜히 뺨이나 이마를 세번쯤 두드려보곤 했는데 재희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럴 때마다 재희도 나의 면도기로 다리나 겨드랑이 털 같은 걸 밀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찾아와서 추태 부리는 전 남친을 쫒아낸 재희에게) 

나는 재희를 꽉 안았다. 나의 악마, 나의 구세주, 나의 재희.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대화는 언제나 하나의 철학적 질문으로 끝났다.

-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 모르지 나도. 

 

(결혼식 준비)

- 내 결혼식에 네가 빠지는 게 말이 되니?

- 말이 왜 안돼. 절대 안 해. 못해. 나 정장도 없어.

- 내가 사줄게. 아르마니 걸로.

- 나 안티 메리지 운동 하고 있어. 너 보니까 결혼제도는 망해야 마땅한 것 같아.

- 개소리 말고 좀 해줘. 너 나대는 거 좋아하잖아.

 

우럭 한점 우주의 맛

 

- 이렇게 달라붙지도 말고요. (게이라고) 떠들고 다닐 일 있어요?

- 이미 온 우주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싸우며 서로 던진 말들) 틀린 말은 아니었고, 틀린 말이 아닌 소리들이 그러하듯 서로에게 꽤 치명적인 사엋를 주었으며 결국 큰 싸움으로 번졌다. 

나는 권태를 딛고 또다시 그에게 내 일상의 지분을 모두 내어주게 되었다.

 

새까만 영역에 온몸을 던져버리는 종류의 사랑. 그것을 수십년간 반복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형태의 삶인가.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

 

(엄마) 너무 애쓰지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이별 후) 그보다 더 나은 사람들, 객관적인 기준으로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도 언제나 변죽만 울리는 관계들을 이어갔다. 그가 나의 가장 뜨거운 조각들을 가져가버렸다는 사실을, 그로 말미암아 내 어떤 부분이 통째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후에야,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가 지는 태양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 아름답구나. 저무는 것들은.

 

(유치원에 안가는 아들 영을 뒤따라간 엄마,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아들을 보며)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뒤에서 보는데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덜컥 무섭더구나. 네가 더이상 내가 아는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네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네가 걷고 싶은 길을 너의 속도로 걷는 게, 너만의 세계를 가진 아이라는 게 그렇게 섭섭하고 무서웠다. 

- 그때부터 산만했나봐, 나.

- 그래서 너를 많이 괴롭혔던것 같네. 간이 작아서. 너를 간장 종지처럼 좁은 내 품안에 가둬놓고 싶었나보다. 

 

나는 벌써 서른한살이고, 성인이 된 지도 10년이 넘었고, 그녀가 내 삶을 지연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누구보다도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정도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저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나를 옥죌 의도가 없고, 나 역시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다만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암이나 곰팡이처럼, 지구의 자전이나 태양의 흑점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다.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녀가 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것만 같았다. 살가죽만 남은 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대도시의 사랑법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을 통해서 규호를 내 곁에 둘 수 있었따. 나를 지킬 수 있었다. 괜찮아. 인생에서 모든 것을 가질 순 없으니까. 카일리. 이것은 온전히 내 몫이니까. 

 

가끔씩은 함께 여행을 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경우 피곤해 죽겠다는 말을 탁구공처럼 주고받았다. 어느새 규호와 나는 서로를 서로의 권태로운 일상으로 여기게 되어버렸다. 땀을 뒤집어쓴 채 반복되는 지루한 나날들처럼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집으로 돌아와 서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침묵 속에 화해를 하고 관계를 이어나갔다. 헤어짐과 화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반짝,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나는 감히 규호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설렘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밤이 끝나는 시점과 해가 뜨는 시점은 이어져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설레는 감정이 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완벽히 끝날 때가 되어간다는 의미겠지. 

 

 

늦은 오후의 바캉스 

 

나는 매일 출처 없는 분노감을 느꼈으며, 출근을 할 때면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하루를 끝낼 수 있기를 빌었다. 

 

역시나 인생에 쓸모없는 일은 없다. 하긴 모든 일이 쓸모가 있다는 것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생에 크게 쓸모 있는 일이 없는 것일 수도. 

 

늦은 우기에도 비는 오고, 다 늦어버린 후에도 눈물은 흐른다.

 

요즘 나는 매일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다. 내 기억 속 규호와 같은 방식으로 부서지고 흩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 확신에서 좀체 벗어나기 힘들다. 

때때로 그는 내게 있어서 사랑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게 규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규호의 실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랑의 존재와 실체에 대해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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