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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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리커버)
세련된 문체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사랑 받아온 에쿠니 가오리의 장편소설 『도쿄 타워』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남자 아이들과 그들에게 찾아온 연상의 연인들과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도쿄 타워가 지켜봐 주는 장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는, 특유의 감각적인 묘사로 도쿄에 사는 스무 살 남자 아이들의 사랑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2005년 국내에 출간됨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며 100만 부 이상 판매된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 타워』는 긴 시간동안 꾸준히 국내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간의 사랑에 힘입어, 2020년 출간 15주년을 기념해 새 옷을 입고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순수한 소년들의 사랑을 전한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연인과의 동거라든지, 부인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불륜이라든지, 에쿠니 가오리 소설 속의 사랑은 모두 특이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사랑뿐이지만, 등장인물들은 결코 고통스럽거나 비관적인 모습이 아니다. 이 작품, 『도쿄 타워』 역시 마흔 살 여자와 스무 살 남자의 만남을 그리며 또 한 번 평범하지 않은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풍경들은 우리가 겪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두 남자, 토오루와 코우지는 모두 40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관계는 판이하게 다르다. 토오루는 하루 종일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며, 그녀와 '함께 살기' 혹은 '함께 살아가기'에 대해 고민한다. 반면 코우지는 귀여운 또래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면서 틈틈히 연상의 여인인 키미코와 만나는 관계를 취한다. 과연 토오루는 '함께 살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버리는 건 내쪽이다'라고 정해놓은 코우지는, 과연 원하는 대로 쿨하게 이별할 수 있을까?
저자
에쿠니 가오리
출판
소담출판사
출판일
2020.03.10

 

 

놀아 주는 거야 좋지만, 버림 받고 죽거나 그러진 말아.

말하자면, 젊은 육체를 탐닉 당하는 셈인가? - 코우지

 

대학이 츄오우선을 따라 위치하고 있어서, 술 모임 장소는 대개 기치조오지 아니면 신주쿠이다. 시부야 거리의 경박한 시끄러움에 코우지는 도저히 정이 가지 않는다. 스크램블 교차로를 건너 약속한 가게로 서둘러 간다. 쇼핑을 한다는 유리와 기치조오지에서 헤어졌다. 

 

도오루는 코우지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했다. 단순히. 그것은 코우지의장점이나 결점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사람이 많은 거리다. 퇴근길의 사람들도, 고교생도, 끝없이 넘쳐 나온다. 토오루는 시부야의 거리가 좋다. 시후미는 아오야마를 좋아하지만, 토오루는 시부야 쪽이 편한 느낌이다.

 

버리는 건 내 쪽이다, 라고 정해 놓았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다. 

 

카미야초에서 지하철을 낼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 추운 밤이다. 입김이 하얗다. 이 비탈길을 올라갈 때 뒤돌아보면 그곳에 도쿄 타워가 보인다. 언제나. 바로 정면에. 밤의 도쿄 타워는 온화한 불빛으로 빙 둘러져 그 자체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곧은 몸으로, 밤 하늘을 향해 '우뚝' 서서. 

 

시후미가 간접 조명을 좋아하는 덕분에 집 안은 어둡고, 사람의 훈기로 후텁지근했다. 

 

지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후미가 주는 불행이라면, 다른 행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언젠가 시후미는 그런 말을 했다. "내세울 만큼 행복하다는 건 아니지만, 사실, 행복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키미코는 악마다. 이토록 분방하게 즐기다가도 한 시간이 지나면 지체 없이 돌아가 버린다. 마치 좋은 아내인 듯한 얼굴을 하고. 

"내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집안일은 완벽하거든." 키미코는 화려한 색상의 탱크톱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완벽?" "남편은 넥타이 하나 자기 손으로 고르는 법이 없어.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도 꺼내올 줄 몰라." "헤에, 폭군이 따로 없네." 

코우지가 놀리자 키미코는 기득키득 웃었다. 

"나는 너무 괜찮은 아니야." 언젠가 키미코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 건 폭군이라고 하지 않아. 얼간이라고 하는 거야. "

"얼간이..."

더운 여름이었다. 코우지는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키미코는 거의 우유처럼 보이는 아이스티를 마셨다.

"아니야. 욕이 아니라, 차라리 그 편이 나아." 

"얼간이 쪽이?"

키미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밖에서 돈만 벌어다 주면 그걸로 족하다는?"

키미코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줄 아는 게 나아. 내가 없으면 곤란하다는 식으로. 간단한 일이었어. 금세 멍청해졌거든. 하긴 원래 멍청했는지도 모르지."

그 때 코우지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키미코가 왜 그런지 가엽게 여겨졌다. 

 

코우지는 연상의 여자를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토오루에게 말한 것처럼, 예를 들어 몸이라든지, 또래 여자애들보다 돈이 많아서 편하다든지, 함께 다니면 폼이 난다는지, 장래에 대해 심각하게 캐묻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아니라 좀 더 단순한 이유였다. 연상의 여자는 천진난만하다. / 코우지한테 이 점은 어쩐지 결정적인 요인으로 다가온다. 여자가 지니는 성질 가운데 천진함 이상으로 좋은 것이 있을까? 

 

디즈니랜드에는 네댓 번 온 적이 있다. 초등학생 때, 이미 갈라선 부모님과 한 번, 중학생 때 한 번, 그 후에 코우지와 당시 코우지가 사귀던 여자애들이랑 왔다. 그 일이 토오루에게는 무척 멀게 느껴진다. 대체 뭐가 재미있다고 그런 곳에 몇번씩이나 갔을까.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기다리지 않는 시간보다 훨씬 행복하다. 시후미와 연결된 시간. 이곳에 시후미는 없지만 자신이 시후미에게 감싸여 있다고 느낀다. 지배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레이엄 그린의 [애정의 종말]은 시후미가 '토오루 나이 정도'에 읽은 책으로, 읽기 전과 비교하여 읽은 후에 '모든 것이 달라진' 소설인 듯 싶다. 토오루는 그저께 그 책을 다 읽었다.

 

 

"즐겁지 않았어?"

확실히 즐거웠다. 도무지 사실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토오루는 떠올리고, 행복과 불행이 구별되지 않아 당혹스러워한다.

"하지만"

간신히 말이 입을 따라 나왔다. 다음 한마디에 토오루는 놀라고, 입 밖에 낸 순간, 그게 자신이 느꼈던 감정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난 버려졌어."

시후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입도 조금 벌렸다.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아주 진지하게, "누가 누구를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어." 라고 말했다. 

"각기 다른 인간이야. 두 명의 각기 다른 인간이 있고, 그곳으로 도중에 또 한 명이 와서, 그때 그곳에 세 명의 인간이 있었어. 그것 뿐이야." 그 말은 토오루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자신은 그때 버려진 것이다. 며칠 씩이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고독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토오루는 묘하게 차분해져 있있다.

"아마 앞으로도 몇 번씩이나 버려지겠지." 

시후미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카운터에 내려놓고 토오루를 응시했다.

"싸우고 싶어?"

토오루는 미소 지었다. "아뇨. 사실을 말해본 것 뿐이에요." "그래도." 

시후미를 되받아 응시하며, 토오루는 조용히 진심으로 말했다. 그래도, 보고 싶었어요."

서로 응시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후미는 짧은 순간 텅 빈 표정을 짓고, 그리고 무척 상처 입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만해."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만해." 라고 반복한다. "슬프게 만들지 말아." 

토오루는 순간, 자신이 심한 짓을 한 것 같아 당황했다. 책망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서, "미안해요." 라고 사과했다. 침묵이 계속되고, 미지근해진 맥주를 마셨다.

"난폭하네." 시후미는 말하고, 다이아몬드 반지가 달린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제야 담배에 불을 붙인다.

"토오루 꿈만 꿔." 토오루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일을 할 때도, 어느새 너를 생각해." 

 

“좀 더 있어요.”
토오루가 말해보았다.
“아침까지. 그러면 바래다 줄 테니까.”
시후미는 받아주지 않았다.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고, 무리야, 라고 말한다.
“아무리 불량스러운 아내라도, 무단 외박은 할 수 없어.”
“그럼 전화하면 되지.”
평소와 다르게, 토오루는 여전히 그렇게 말했다.
“무리야.”
시후미는 반복하고, 커피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같이 살아요.”
말이, 느닷없이 토오루의 입을 따라 나왔다. 침묵이 찾아들고, 이윽고 시후미가 외국인처럼 양손을 올렸다.
“좀 봐줘.”
토오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후미를, 아사노 곁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서로 일어선 자세 그대로, 가만히 마주 보았다.
어쨌든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러나 정신이 들고 보니, 토오루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말은, 언제나 토오루를 배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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