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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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웃고 자주 고개를 주억거리며 밑줄 친 문장들이 너무 많다. 전자책으로 읽었기에 남긴 밑줄은 언젠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땐, 아 종이책 사서 읽을 걸 하고 후회하며 타이핑할 수밖에. 그래도 좋았던 문장을 다시금 읽는 이 순간이 어찌 안 좋을 수 있으랴. 다음으로 읽을 고닉책은 (미리 구매한) 종이책이다. 행복하군.

 

 

 

내 친구 레너드는 재치 있고 영리한 게이로, 자기 불행에 대해서라면 조예가 깊다. 그리고 그런 조예가 그의 활력이다.

 

손상의 정치를 공유하는 사이다, 레너드와 나는. 운명처럼 지워진 사회적 불평등 속에 내던져지듯 태어났다는 강렬한 감각이 우리 두 사람의 내면에서 활호라 타오른다. 우리의 화두는 살아보지 않은 삶이다. 각자 이런 질문은 던져본다. 불평불만의 땔감으로 쓰기 딱 좋은 조건 - 얜 게이, 나는 짝 없는 여자 -이 우리 삶에 마련돼 있지 않았더라면 우린 그저 불평등을 직접 만들어내기라도 했을까? 우리 우정은 이 질문에 천착한다. 기실 우리 우정의 나름의 언어와 성격을 부여하고 우리 우정을 정의 내리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이며, 통속적 인간관계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있어서도 이제껏 내가 겪어본 그 어떤 친밀함보다 이 질문에서 더 많은 실마리를 얻었다. 

 

1740년대 새뮤얼 존슨 

존슨은 시골살이를 질색하고 두려워했다. 그 폐쇄적이고 적막한 거리는 그를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시골에는 자기를 되비춰주는 존재가 없었다. 그 쓸쓸함은 견딜 수 없는 게 되어갔다. 도시의 의미는 쓸쓸함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데 있었다. 

 

(웨스트앤드애비뉴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야외 연주회를 보는 어린 고닉)

별이 빛나는 아늑한 밤에 어룽거리는 조명 아래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조율하기 시작하면 나는 그 지적인 청중이 일제히 하나 되어 음악을 향해, 그 음악 속에 빠져든 그들 자신을 향해 가만히 기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주회는 마치 야외로까지 외연을 확장한 삶의 맥락 같았다. 그럴 때면 나도 짐짓 바랐던 지적인 모습으로 몸을 숙여보았지만, 그게 그들의 움직임을 그저 흉내 낸 몸짓일 뿐이란 것도 알았다. 아직 그들이 하는 식으로 음악을 사랑할 권리까지는 손에 넣지 못한 상태였다. 그로부터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될 날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가면 갈수록 사회 변두리로 향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이 응어리진 쓰린 가슴을 달래주는 건 오직 도시를 가로지르는 산책뿐이었다. 사람들이 계속 인간으로 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반백 가지 방식, 변화무쌍하고도 기발한 그 생존 기법들을 거리에서 보다 보면 팽팽했던 무언가가 느슨해지고 넘칠 듯 찰랑대던 게 빠져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온 신경종말에서 일제히 날을 세우던 거부감이 슬며시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거부감은 나의 동행이 되었다. 

 

(맥시멀리스트 레너드)

레너드가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절박한 마음으로 물리적 환경을 채워 넣고 있다는 걸 어쩐지 알 것만 같다. 그렇게까지 해도 내가 우리집에서 느끼는 고만큼의 편안함조차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발밑에 단단히 디디고 선 느낌을 바라는 사람인데. 

 

(래너드가 안내하는 뉴욕을 함께 걸음) 

이런 여정에선 걸으면 걸을수록 시공간의 성격이 자꾸만 바뀌었고 '시간'이란 개념도 증발해버렸다. 거리는 기다란 리본처럼 한없이 펼쳐졌고 우리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은 자꾸만 확장되어 어린 시절에 그랬듯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언제나 빠듯하고 언제나 촉박한, 정서적 안정을 위한 덧없는 척도일 뿐인 지금의 시간과는 달리.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대체 불가능한 -본질적인- 자아라는 개념에 교육까지 받은 고도의 지성을 이토록 쏟아부은 적은 역사상 없었다. 심리적으로 조금이라도 불편한 건 절대 참아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우연적 타자 취급을 받은 적도 역사상 없었다. 

우정을 나눌 때 겪는 갖은 난관이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3세기 로마 작가 카이우스는 이렇게 썼다.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지 못한 사람은 어떤 타인에게도 우정을 기대할 권리가 없다.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으뜸가는 의무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적대적일 뿐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타인의 가장 선한 마음조차 꺾어버리고 '세상에 친구 따윈 없다!'며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불평까지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새뮤얼 콜리지와 윌리엄 워즈워스 우정)

서로에게서 온전한 기쁨을 만끽하던 두 사람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를 알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 속에서 자기 최선의 자아를 느끼는 게 더는 불가능했을 뿐이다.

자기 최선의 자아. 이는 몇백 년간 우정의 본질을 정의할 때면 반드시 전제되는 핵심 개념이었다.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것. 치유의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이런 개념을 얼마나 낯선가! 오늘날 우리는 서로 최선의 자아를 긍정하기는커녕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정이라는 결속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감정적 무능 - 공포, 분노, 치욕 - 을 인정하는 솔직함이다. 함께 있을 때 자신의 가장 깊숙한 부끄러움까지 터놓고 직시하는 일만큼 우리를 가까워지게 만들어주는 거소 없다. 콜리지와 워즈워스가 두려워했던 그런 식의 자기폭로를 오늘날 우리는 아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상대에게 알려졌다는 느낌이다. 결점까지도 전부. 그러니까 결점은 많을수록 좋다. 내가 털어놓는 것이 곧 나 자신이라는 생각, 그것은 우리 문화의 대단한 착각이다. 

 

로맨틱한 사랑이 갈망과 환상과 정서로 짜인 직물 전체를 꿰뚫여 엮여 있는 내 감정의 신경계에 마치 물감처럼 스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 심령을 집어삼켰고, 뼛속을 파고드는 아픔이었으며, 영혼의 짜임에 워낙 깊숙하게 꼬여 있어서 그것이 일으키는 파상을 똑바로 보려고 하면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렇게 남은 인생 고통과 갈등의 이유가 될 터였다. 나는 굳어버린 내 심장을 애지중지해왔지만, 로맨틱한 사랑의 상실은 여전히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본능적으로 얼음길에서 한 노인을 도운 후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힘 있고, 생기 넘치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은 고닉) 

난감한 상황에선 누구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있고, 그 광경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손을 내밀 의무가 있다는 평범한 인식을 그는 그렇게 우리 두 사람에게 상기시켰다. 나는 손을 내밀었고 그는 내 손을 잡았ㄷ다. 그는 간청하지 않고 나는 생색내지 않은 채 함께 서 있던 그 30초 동안, 그의 얼굴에선 노년의 가면이, 내 얼굴에선 활력의 가면이 벗겨져 떨어졌다.  역기능 중인 미국 사회, 전 지구적인 잔혹성, 개개인의 자기방어 한가운데서도,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온전히 바라보았던 것이다. 

 

*레너드가 이야기 수집가인 친구 '톰'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 

1. 어떤 여자가 여객선에서 떨어진 거야. 몇 시간이 지나 사람들은 여자가 사라졌단 걸 알게 되지. 여객선은 회항해서 왔던 길로 돌아갔고 여자를 발견했지. 그 여자가 아직 헤엄치고 있었거든.

2. 한 남자가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높은 다리에서 뛰어내리는데, 허공에서 도중에 마음이 바뀌는 바람에 다이빙 자세로 바꿔서 살아남아. 

인생은 지옥이고, 인간종의 파멸은 예정된 것이지만 그래도 헤엄은 계속 쳐야 한다. 

고닉 : 첫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이 여자고 두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이 남자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레너드(게이) : 근데 그 남자 게이야, 바보야. / 그 여자는 배에서 떨어졌어. 뛰어내린 게 아니라고. 그러곤 사고라도 당하면 끝장일 테니까 곧장 헤엄을 치기 시작한 거지. 한데 그 남잔 우유부단하기가 자살 수준이었던 거야.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낫겠다고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뛰어드는 쪽으로 기울었지. 영락없는 게이라니까. (ㅋㅋㅋㅋㅋㅋㅋ 레너드 매력덩어리)

 

활기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표출하고 싶어 안달이지만, 그런 게 일인 사람은 쉽게 울적해진다. 

뉴욕의 우정은 울적한 이들에게 마음을 내주었다가 자기표현이 풍부한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는 분투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는 누군가의 징역에서 벗어나 또 다른 누군가의 약속으로 탈주하려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 도시가 그 여파로 어지럽게 동요하는 듯이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고닉 > 레너드.

요전에 말이야. 남을 판단하기 좋아한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거든. 웃기시네, 속으로 그랬지. 10년 전 나를 봤어야 하는데. 근데 그거 알아?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인 걸 사과하는 것도 지긋지긋해. 판단하기 좋아하면 왜 안되는데? 나는 판단하기 좋아하는 게 좋다고. 판단을 하면 안심이 된단 말야. 절대적인 것들. 확실한 것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좋았는데! 그런 걸 되찾고 싶어. 되찾을 순 없겠지? 

나는 사는 게 적성에 안 맞아. / 레너드 : 누군들 맞겠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랠프 월도 에머슨이 말했다. "혼자인 사람은 누구나 진실하다. 타인이 들어서는 순간 위선도 시작된다. 그러니 친구란, 본질적으로 일종의 역설일 수밖에 없다." 

 

"녹음을 만끽하겠다고 뉴욕의 경계를 벗어날 필요가 전혀 없다. 요 앞 지하철이든 레코드 가게든, 뭐가 됐든 사람들이 인생을 송두리째 후회하진 않는다는 신호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풀 한 포기도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없으니." - 프랭크 오하라 (미국의 시인, 음악가, 미술비평가)

 

동성애혐오자들과 식사 후 레너드와 고닉의 대화 (레너드는 조용히 있었다.)

레너드 : 나는 관심 대상이 아닌 거야. 관심 끌 만한 면은 그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그가 방금 한 그 말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 벌써 몇 시간째 그와 함께 있으면서도 나는 내내 혼자였다. 하지만 그저 무의미하게 지나갔을 저녁에 그의 말이 부여한 명징함 덕분에, 삶이 조금은 더 견딜 만하게 느껴진다. 

레너드와 우정은 내가 사랑의 법칙을 들먹이면서 시작됐다. 사랑의 법칙엔 기대가 수반된다. "우리는 하나야." 나는 레너드를 만나자마자 결론을 내렸다. "너는 나고, 나는 너야., 서로를 구원하는 게 우리 의무고." 이런 감상이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음은 몇 해가 지나서야 깨달았지만. 사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영토를 힘겹게 횡단하다 국경이 맞닿은 곳에서 이따금 만나 서로에게 정찰 기록을 건네는 고독한 두 여행자다. 

 

인생이란 체호프식이든 셰익스피어식이든 둘 중하나라는 걸 나는 일찌감치 배웠다. 우리 집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외로워! 라고 울부짖던 고닉의 엄마) 

 

"어떤 무리에 속한 사람이든 여느 누구만큼이나 똑같이 좋은 사람들이다." 키츠가 스물다섯도 되기 전에 알았던 사실을 나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 나를 기다리는 건 셰익스피어식 인생이었다. 

 

지금껏 이 길을 걸어온 이유, 거기서 확인하게 된 사실 - 불경스런 불만이 삶을 끝없이 가로막으리라는 것 - 그것이 바로 이 여정의 의미임을. 

 

삶이 불능의 총합처럼 느껴지려 할 때면 나는 타임스스퀘어까지 산책을 나선다. 세상에서 가장 요령 넘치는 하층민들의 본고장인 그곳에 가면 금세 통찰이 회복된다. 

 

한때 함께 늙어갈 수 있으리나 믿어 의심치 않았던 친구가 있었다. (...) 영혼을 계속 정련해주는 우정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몇 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그런 구석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우정은 애착이었다. 영혼을 정련시키지는 않았을지언정, 영혼에 단연 넉넉한 양분이 되었기에 그야말로 긴긴 세월 서로의 존재 안에서 각자의 호기심 많은 자아를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준 그런 애착. / 각자의 불안이 심어놓은 내면의 목소리들은 걸핏하면 빈정대거나 남을 판단하길 좋아했다. 우리가 처음 서로에게서 자신을 볼 수 있게 된 건 그런 무시무시한 자기방어를 적당히 내려놓기 몇 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 그렇게 계속 만나서 대화를 나눌수록 우리가 어쩌다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아내는 일이 각자에게 중요한 과업이라는 걸 더 확실히 알게 됐다. / 실제로 삶을 빚어내는 바탕이 되었던 공감과 연민이 차츰 깎여나가면서 우리가 우정을 바친 그 마음과 영혼의 모험도 천천히,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숲의 빈터를 무자비하게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우리 사이의 간극이 우리를 덮쳤다. 

에마와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영원한 친구 따윈 없으며 오직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라던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올랐다. /물론 처칠은 세계를 향한 야심이 개인 간의 충실한 마음을 짓밟는다는 듯으로 한 말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처칠은 틀렸고, 영원한 이익 같은 것도 없다고. 나와 에마의 관계를 무너뜨린 건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우리 자신의 '이익'에 대한 배반이었다. 

우리 내면세계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변덕스럽고 언제나 전환 중인 상태라고,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다. 그는 그런 전환들 자체가 바로 실제라고 생각했으며 경험이란 "그 수많은 전환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정서적 공감에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 평범한 날 아무때고 결혼이나 우정, 혹은 업무 관계가 '돌연' 정말로 끝장나버리는 일을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로맨틱한 사랑에서 감정을 거둬들이는 과정은 다들 익히 아는 드라마라 거뜬히 설명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격정이 불러온 그 강렬함에 압도된 우리는 사랑에다 변신의 힘을 부여하고, 그 사랑의 반향으로 자신이 새로워지고 심지어 온전해질 것이라 상상한다. 하지만 기대했던 변신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열병과 한데 얽혀 있던 소망은 절망 속에 무너져 내린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이해받았다고 느꼈던 그 짜릿한 경험은 벌거벗겨진 상태가 되었다는 불안감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핵심은 사랑하는 이가 존재할 때 (최선의 자아까지는 아니더라도) 표현하는 자아가 꽃을 피우리라는 기대다. 모든 것은 그 활짝 핀 자아에 얹힌다. 하지만 각자의 내면에 있는 그 불안한 것, 유동적인 것, 변덕스러운 것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만개한 자아를 꾸준히 갉아먹고 있다면 어떡해야 할까? 실은 표현을 하고 싶어하는 자아라는 가정 자체가 환상이라면? 안정적인 친밀감에 대한 열망이 - 그보다 더하진 않더라도 그에 못지 않게 무진장한 - 불안정해지려는 열망에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면? 그럼 어떡해야 하는 걸까? 

 

 

"세상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혼자 됨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우리가 베풀지 못한 건, 우리 자신을, 우리의 고독한 영혼을 위해 움켜잡고 낚아채고 그러모을 것들이 뻗으면 닿을 거리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벨 볼턴 : 메리 밀러가 1946~1962 (63~69세) 해당 필명으로 모더니즘 소설 3편 출간

(볼턴 역시 프로이트가 알았던 걸 알고 있다.)

외로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불가하게도 우리는 그 외로움을 포기하길 망설인다. 심리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단 한순간도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야말로 갈등 간의 갈등이다. 이것이 볼턴의 통찰이자 유일한 깨달음이었다. 

 

도시의 군중에 관해 쓴 19세기 가장 위대한 작가 둘은 찰스 디킨스와 빅토르 위고

 

(노인 시설로 들어간 앨리스 작가와의 우정)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대화 상대를 간절히 원했고, 나는 때 내게 무척 중요했던 작가에게 계속 경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고닉 : 여긴 대화가 되는 사람이 한명도 없어요?

앨리스 : 없지 그럼. 잡담이야 되지. 잡담은 많이 나눠요. 하지만 대화? 없어요, 그런 건.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 대화는 당연 없고 말고.

앨리스는 매일같이 귓속을 채우는 잡담 때문에 자기가 죽어간다고 했다. 침묵만도 못해, 훨씬 못해, 그렇게 말했다. 

앨리스와 나를 둘 다 아는 친구는 그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저물어갈 수밖에 없다니 너무 슬프다고 했다. 

 

(웨스트사이드 주택가의 분위기) 여과되지 않은 채 고삐 풀린 감정들이 섬세한 뉘앙스 따위 없이 이리저리 날뛴다.

 

[매니와의 연애] 

(무를 지향하는) 매니와 내가 그러듯이 물건에 대한 소유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앞으로도 자신의 음울한 자아를 기꺼이 그 자리에 계속 세워둘 만큼 확고한 주변인의 감각으로 살아가겠다는 뜻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은 대화란 공통된 이해관계나 계급의식이나 공유된 이상 따위보다는 기질에 달린 문제다. "그게 대체 뭔 소린데?"라고 따지기보다는 "뭔 말인지 딱 알지"하며 자기도 모르게 반색하게 되는 기질. 그런 공통의 기질이 있으면 대화는 자유로우면서도 거침없는 흐름을 어지간해서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없으면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기 마련이다.

언쟁이 한창 과열되면 나는 이런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려 안간힘을 쓴다. "잘 봐, 그냥 서로 주파수가 어긋난 거야."

 

문제는 우린 친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정 없이, 우리는 황야에 외따로 머물렀다.

나는 세상 사람 모두가 알면서도 늘 잊고 지내는 게 무언지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성적으로 사랑받는 것은 실제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받는 게 아니라 서로의 내적 욕망을 자극하는 능력으로 사랑받는 것이라는 걸. 매니가 욕망했던, 내게 할당됐던 그 권력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누군가를 영원토록 매혹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람의 머릿속 생각이나 영혼의 직관뿐인데, 내가 품은 그것들을 매니는 사랑하지 않았다. 물론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매니에겐 그런 것들이 필요치 않았다. 이렇게 누군가와 감각으로만 연결된다는 건,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내던져져서, 취약해지다 못해 곧 자기 회의에 빠져 죽어갈 거라고 느끼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시모어 크림 (1950년대 초) 뉴욕 저널리스트에 대한 글] - 멋진 표현의 토막들

그 목소리리는 철저히 도회적이기도 했다. 시모어 크림 같은 사람을 낳을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 뉴욕밖에 없을 것이다.

의식의 흐름 같기도 한 광적이고 독창적인 문장 구조를 도발적인 방식으로 활용한 파격적인 산문체 

그가 던진 메시지는 뉴욕이라는 토착어를 괄목한 방식으로 활용해낸 언어로 전달되었다.

"나와 비슷해 보이는 저 수많은 사람도 영혼의 폭동에 어울리는 전문적인 외피를 끝끝내 찾아내지 못한 신세다. 많은 이가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이건 추측이라기보단 상처와 별들이 내는 목소리다."

 

[친구들에 대한 애피소드]

그리고 실비아도 만난다. 심리치료의 열혈 신봉자인 그는 2년을 내리 나만 보면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도 이제 성숙해져서 디 이상 친구들에게 걔들이 줄 수 없는 걸 달라고 요구하지 않게 됐어요. 이젠 우정을 상대가 주는 그대로 받아들인답니다." 3년째에 접어들지 실비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지긋지긋하네요! 사는 게 시시하게 느껴진다니까요. 시시하고 불안전하게." (ㅋㅋㅋ)

내 친구들도 만화경 같은 매일의 경험을 잘 흔들어 섞어야만 친밀함에서 오는 고통, 공공장소의 활기, 낯선 이들의 터무니없는 간섭 따위를 적당히 희석될 만하게 배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만화경 같은 매일의 경험을 잘 흔들어 섞어야만 친밀함에서 오는'이란 표현을)

 

*크로스드레서 = 지정성별과는 통상적으로 다른 성별로 인식되는 복장으로 다니는 사람 (아하) 

 

[엘리트 정찬에 가서] 

이 사람들이 쓰는 어조, 구문, 어휘가 낯설어서 처음엔 시시한 대화란 걸 눈치채지 못했다. 온갖 주제를 꺼냈지만 슬쩍 언급만 하고 지나가려는 것이지 토론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디스 워튼 vs 헨리 제임스 (들의 작품을 읽어야 아래 농담도 즐겁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헨리 제임스가 쓸 얘기지 이디스 워튼은 아니네. 워튼은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제임스는 아무도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공상을 좋아하며 매일 9km 걷던 고닉] 

머리를 비우고 거리의 삶을 경험하고 오후의 우울감을 떨쳐내려고. 그렇게 거는 동안 쉴 새 없이 공상에 빠졌다. 때로는 사랑이나 ㅊ찬사를 받았던 기억 속 순간들을 이상화하며 과거의 꿈속으로 빠져들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미래를 꿈꿨다. 영원불변의 가치가 담긴 책을 쓰고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고 내가 아직은 되지 못한 유형의 여자가 될 내일. 아 그런 내일이라니! 힘이 불끈 솟는 그런 상상 덕분에 대책 없이 무기력하던 숱한 날들을 어찌나 멋지게 지나왔던지. 

(그러다가 내동댕이쳐진 공상하기)

언제나 그렇듯 머릿속으론 영화 한 편을 재생시키는 중이었다. 머릿속 그 영화 한 중간에 일종의 흑백 정지 화면, 그러니까 전파장애가 생긴 텔레비전 화면 같은 것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눈앞에서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더니 정말로 끝이 나버렸다. 그 순간 무언가 매캐한 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고, 저 깊은 곳에서부터 내 자신이 수축되는 걸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아무래도 그 몽상이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자리를 잡아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공상에 저당 잡히는 바람에 지금 여기에는 의식의 자투리만을 쓰기라도 했던 듯이. 그런 확신이 든 건, 하루에도 몇 번이고 그 맵싸한 맛이 내 입안을 점령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통찰이었다. 나는 몽상이 그간 내게 무슨 일을 해주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 무슨 짓을 해왔는지도.

기억할 수 있는 시점 이후로 평생, 나는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상태라는 게 들통날까 봐 두려웠다. 원하는 일을 하면 기대에 못 미칠 게 분명했고,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들을 따라가봤자 거절당할 게 뻔했으며, 암만 매력적으로 보이게 꾸며봤자 그저 평범해 보일 것이었다. 계속 움츠러들던 영혼은 그렇게 손상된 자아를 둘러싼 모습으로 굳어져버렸다. 나는 일에 몰두했지만 마지못해 그럴 뿐이었고,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은 있어도 두 걸음을 옮긴 적은 없었으며, 화장은 했지만 옷은 되는대로 입었다. 그 모든 일 중 무엇 하나라도 잘해낸다는 건 별생각 없이 삶과 관계 맺는 일, 다시 말해 내 두려움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삶을 사랑하는 일이었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확실히 할 줄 아는 건 몽상으로 세월 흘려보내기였다. 그저 '상황'이 달라져서 나도 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고만 있는 것. 

 

[어릴 적 동네 친구들]

언젠가부턴가 각자 사는 꼴을 갖춰가기 시작하면서 대부분 멀어져버렸지만 그래도 소식은 이어졌다. 누군가와 처음 성적 흥분을 주고받은 것도, 애지중지했다가 배신을 당하기도 하는 우정을 처음 경험해본 것도, 특권의식이 요상하게 고개를 들었다 또 요상하게 꼬리를 내리는 기분을 처음 맛본 것도 다 그 무리 속에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관심을 건넬만한 시간도 심적 여유도 없는 노동자 계급 이민자들의 자녀였던 우리는, 거리에 나와 서로가 서로에게서 끌어내는 반응 속에서 자기 존재를 감지하는 일이 온통 정신에 팔려 있었다. 우리의 놀이는 사실 진짜 놀이였다기보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중요했던 그 사회의 가치와 존재 중이란 위계 속에서 힘과 요령, 술수와 기발함으로 매일 각자가 설 자리를 정하는 연습에 가까웠다. 

 

*객관적상관물 : 문학작품에서 특정한 정서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찾아낸 사물, 정황, 사건 (그런 상실이 다른 어딘가에 근원을 둔 어떤 조건의 객관적상관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셀케트 여신의 목각상을 바라보며]

지독한 음울함이 나를 덮쳐 온다. 그것이 깨어 있는 삶 전반에 불규칙한 규칙성을 가지고 그래왔듯, 다시금 깊숙이 묻혀 있던 지긋지긋한 언어의 감각이 내 팔과 다리와 가슴과 목구멍을 샅샅이 훑고 지나간다. 그 감각이 뇌에 가닿게 할 수만 있다면, 나 자신과의 대화가 시작될 수도 있을 텐데. 

 

[외로움]

사람은 이상화된 타자의 부재로 인해 외롭지만, 그 쓸모 있는 고독 속에 스스로를 상상의 동반자 삼아 침묵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각 있는 존재라는 증거를 방 안 가득 채워 넣는 '내'가 있다. 

 

[짝 없는 여자들 - 조지 기싱 소설을 다루며]

될 대로 되라지! 그렇게 화난 목소리로 외치기란 얼마나 쉽던가! 반면에 이런 반항적 단순함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위력을 경험한다는 건 얼마나 호된 시련인지.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헤매고 있는 밑바닥에서 그 간극이 아주 깊은 골짜기처럼 패어버렸다고. 죽기 전에 평지에 닿으리라는 희망으로 절벽을 기어오르는 순례자의 천로역정처럼 말이다. 

 

고닉 - 해방운동으로서의 정치가 시작된 지도 어언 40년인데 어째서 우린 이 영화만 한 결과물도 못 내놓는 걸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이만큼 잘 다룬 대화가 담긴 영화도, 연극도, 소설도 없잖아.

레너드- 간단해. 갈등이 일단 공론화되면 정치는 흥하고 예술은 망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제 자리에 서서 불끈 쥐어 치켜든 주먹, 분홍 리본, '정의'라고 새긴 타투 같은 인터넷 게시물이나 들여다보고 있게 되는거지. 

 

무를 위한 글 - 사뮈엘 베케트 낭독

> 20년 전 젊은 시절 녹음한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낭독하는 (뇌졸중 후유증에 걸린) 배우 조니 딜런 

> 친구들을 초청하여 베케트의 독백극을 들려줌 

중요한 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구상에 있기만 한다면. 필요한 거라곤 숨 쉬는 게 전부다. 그래, 여러 순간이 있지, 이 순간처럼, 있을 법한 존재로 내가 거의 복원된 듯한. 그런 ㅟ에서 지나간다, 모두 간다, 그리고 나는 다시 멀리 있다. 나는 멀리 나를 기다린다, 내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뉴욕]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도시를 있는 그대로 느낀다. 내가 지금까지 몸으로 살아낸 것은 온갖 갈등이지 환상이 아니었으며, 뉴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 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 

 

뉴욕은 일자리가 아니에요, 기질이죠. 그들이 그렇게 답해준다. 뉴욕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인간의 자기표현력에 대한 증거가 - 그것도 대량으로 - 필요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다. 가끔씩도 아니고 매일 필요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거라서. 감당할 만한 도시로 떠나버리는 사람들은 뉴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뉴욕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은 뉴욕 없인 못 사는 사람들이다. 아니면 뉴욕 없이 못 사는 건 나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지도. 

 

 

 

읽고 볼 것 :

짝 없는 여자들 - 조지 기싱

영화 지니어스

(단편) 애러비 - 제임스 조이스 

세 자매 - 안톤 체호프 (희곡) 

이름 없는 주드 

여인의 초상

사교계의 다이애나

(음악) 로즈의 차례 rose's turn - 뮤지컬 집시의 노래 아하.

무를 위한 글 - 사뮈엘 베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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