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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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하게 지내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 그것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이나 혐오감과 흡사한 절실한 욕구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뿐이었다. 그것은 이름 없는 행복이었다. 스퀴트네르는 어떤 시인을 인용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무욕보다 더한 만족은 없다>. 

 

(오후 4시에 방문한 이웃을 처음 바라보며)

나는 그가 서글픈 부처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뜬 수다를 늘어놓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웃이 심장 전문의라니)

충격이었다. (...) 그러니까 그 머릿속에 지성이 자리 잡고 있따는 말이었다. 그 사실에 매혹당한 나는 내가 예측한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하기로 했다. 이웃집 남자는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가 내 간단한 질문에 15초나 뜸을 들인 후에야 대답하는 것은 내 질문에 부질없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가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그의 서글픈 육체로부터 엿볼 수 있었던 것과 부합하는 말라르메적인 동기임이 분명했다. 그의 간결한 말투와 <그렇다>와 <아니다>에 대한 지나친 편애는 [마태오의 복음서]의 저자나 베르나노스의 화법을 본받은 것이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실존적인 불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그가 이곳에서 40년을 산 것은 세상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고 그가 우리 집에 와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종류의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었다. 

 

(지속적으로 침묵하는 그를 바라보며)

의사의 침묵은 처음부터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빈약한 물질만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태도는 평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그에게 이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 말이 흔히 뚱뚱한 이들에게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고문자의 얼굴에는 그런 침착함이나 온화함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65년 동안 예의로 무장하고 살아온 사람이 한 순간에 그걸 내던져 버릴 수 있을까? / 우리가 언제나 예의 바르게 살아왔다고? / - 당신이 내게 그런 걸 묻는다는 그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 안에 예절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가를 알 수 있지. 우리는 예의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조차 못 하게 된 거야. 무의식과 싸울 수는 없잖아. 

 

피해를 입는 경우에 장점이 있을 수 있다면 피해 당사자가 자신의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적 성찰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내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마칯 거기서 미지의 힘을 발견하기를 기대했던 것처럼. 

 

우리의 고문자에게 뒤범벅된 지식을 쏟아 놓으면서 나는 솟구치는 즐거움을 가눌 길이 없었다. 마침내 나는 거의 대부분의 강연자들이 왜 그토록 견딜 수 없는 존재들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긴 것은 그였다. 이런 냉혹한 싸움에서 이기는 데는 더 똑똑하다든지 더 사려 깊다든지 하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유머 감각을 갖는다거나 박학한 지식의 물살로 상대방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육중하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최대한 숨 막히게 하고, 초치대한 예의 없고, 초치대한 공허해야 했다. 

 

공허의 힘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공허는 냉혹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예를 들어 공허는 선을 거부한다. 공허는 집요하게 선의 길을 가로막지만, 반대로 악의 침투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주 오래된 친구 사이처럼, 공통된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물론 선과 악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진짜 악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이다. 선보다는 악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양쪽의 화학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댕은 악이 아니라 불길한 가스가 깃든 거대한 공허) 

나는 처음에 그를 비활동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나를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밀, 책이 모든 것의 열쇠가 될 순 없어.  / 물론 그렇지. 하지만 책 역시 이웃이 될 수 있어. 청할 때만 내 집에 왔다가 가줬으면 하고 생각하는 순간 일어서는 이상적인 이웃이지.

그는 선량한 사람이 아니야. 방법이 나쁜 선의는 선의가 아니야. 

 

하지만 그는 내 삶을 망침으로써 자기 삶을 망치고 있었다. 그건 악몽이었다. 아니, 더 나빴다. 아무리 끔찍한 악몽이라도 끝이 있기 마련이건만, 우리의 시련에는 끝이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자신의 성격을 선택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소심한 자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신화에 미치지 않고서 4년을 한결같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충격적인 운명에는 어떤 타당성, 아니면 적어도 어떤 논리적인 일관성이 있을 터였다. / 안타깝고 어이없게도, 약한 자들은 그런 데서 의미를 찾음으로써 위안을 삼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 하지만 다른 이들의 지혜란 아무 쓸모도 없었다. 태풍이 닥칠 때, 그러니까 전쟁이나 불의나 사랑이나 병이나 이웃집 남자가 닥ㅊ쳐올 때 인간은 언제나 혼자다. 막 이 세상에 태어난 고아일 뿐. 

 

(분노를 터트리고) 내가 후려친 것은 나약하게 살아온 65년의 세월이었다. 나는 우렁찬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런 좌우명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 내 삶을 망쳐 버리자, 그러면 다른 사람의 삶 역시 망쳐 버릴 수 있을 테니까.> 

 

오디세우스의 아내는 낮에는 구혼자들과의 약속대로 천을 짰고, 어둠을 틈타서는 구혼을 거절한느 오만한 여주인공의 모습을 되찾았다. 빛이 예절 바르고 상냥한 희극에 우호적이었다면, 어둠은 인간에게 파괴적인 분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 

 

- 당신 관점으로 그의 삶을 판단하지 말라는 거야. 사람들이 당신 머릿속에 삶이란 가칯 있는 것이란 생각을 넣어 주었지. 

사람들이 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넣어주지 않았더라도 난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난 삶을 사랑해.

- 어떤 이들은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어떤 이들은 견해를 바꾸기로 한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그 사람도 삶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어.

 

강요된 행복은 악몽과 다를 바 없었다. 

 

오늘은 눈이 내린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셰익스피어는 묻고 있다. 그 이상 위대한 질문이 어디 있으랴. 나의 흰색은 녹아 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달 전 여기 앉아 있었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런 삶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쳐 온 일개 교사라는 것을. 지금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녹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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