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728x90
반응형

 
욕조가 놓인 방
신과 인간의 관계를 통한 기독교적 구원의 문제부터 인간 내면의 불안과 욕망까지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문학적 폭과 깊이를 선보이고 있는 작가, 이승우의 『욕조가 놓인 방』이 출간되었다. 2006년 작가정신 ‘소설향’으로 처음 출간된 이후 프랑스어로 번역, 소개되어 해외에서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욕조가 놓인 방』은 ‘사랑’에 관한 오랜 탐색을 보여준 이승우 소설의 원점이자 서문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매 순간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자기합리화와 명분 없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인간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낸 이 소설은 의지가 욕망을 제압해야 하는 강박증에 시달리며, 혼자 있을 때조차도 욕망 ‘그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감정을 숨긴 채 연기하는 현대인의 비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남자에게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지닌 한 여자가 다가온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 욕조를 놓아두고, 밤마다 그곳에서 자신의 상처를 불러내 어루만진다. 남자는 욕조가 놓인 그녀의 방을 드나들지만, 끝내 그녀의 상처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욕조가 놓인 방』은 인간이 사랑을 통해 구원에 다다를 수 없는 이유와 일상의 울타리로부터 탈주할 수 없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되물으며, 사랑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을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이승우 작가는 1993년 『生의 이면』으로 제1회 대산문학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받으며 대체 불가능한 문학 세계를 성취해왔다.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 이승우를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있는 작가로 지목했고, 프랑스 최고의 페미나문학상 외국 문학 부문 최종 후보로 오르는 등 세계적으로도 꾸준히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우리 문학으로서는 드물게 형이상학적 탐구의 길을 걸어온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글쓰기는 언제나 또 다른 방식으로 읽히고 환기되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있다.
저자
이승우
출판
작가정신
출판일
2022.04.26

 

 

 

 

마음은 더구나 공유한다는 믿음이 강했다. 그러므로 얼마 전까지 당신의 것이기도 했던 그녀의 마음을 상상하는 일은 무엇보다 쉬운 일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 쉬운 일이 쉽지 않았다. 당신이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의 마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 가늠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믿음을 회의하기 시작했다. 생각과는 달리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깨달음이 당신을 당황하게 했다. 

 

(그녀와 첫키스)

신경들은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혈관의 피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 달은 지상에 너무 가까이 내려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세상은 세상의 첫날처럼 환했다. 

 

(구원파적 vs 점오적 사랑) chpt. 7 

그런데 사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이 불편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사랑이 시작된 시점을 정하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세상의 모든 연인들은 사랑이 시작된 시점을 규정하는 데 있어 두 가지 상이한 입장을 취한다. 하나는,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구원파적 엄격성이라고 할 수 있는 태도다. 자기가 구원받은 시간을 분초까지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이른바 구원파들은 오랫동안 느슨한 구원론을 견지해 오던 기존 기독교단의 신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구원받은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은 시간을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대문이다. 다가올 어느 시간에, 가령 세상 종말의 날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애매한 미래형 시제는 철저히 거부된다. 사랑에 대해 이와 같은 구원파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사랑이 시작된 시점에 대해 종교적인 철저함을 요구한다. 이들은 사랑이 시작된 시점을 인지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랑의 진위를 가름할 수 있다는 식의 과격하고 다소 편집적이기도 한 주장을 내세운다. 사랑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사랑에 대한 순결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반대로 사랑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의혹과 혐의의 대상이 되기 쉽다.

다른 쪽에 불가지론이 있다. 사랑이 시작된 과거의 한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확신과 진행형 상태에 더 주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사랑의 속성을 점오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순간에 갑자기 깨달음이 찾아왔다면 그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시간의 매듭이 지어지기 때문이다. 돈오의 매듭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나 물이 가죽으로 스미는 것처럼 천천히, 조금씩, 점점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 진실이라면 시간의 매듭은 지어지지 않는다. 모든 상태는 '이미'와 '아직 아닌'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구원파적 엄격함을 사랑에 빗댄 사람들이 사랑이 시작된 시점을 사랑의 완성과 연결시키고 그 이후의 시간은 다만 그 사랑을 즐기고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간주하는 반면에 점오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사랑의 시작과 완성을 동일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작이 그런 것처럼 완성 역시 매듭지을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물은 매듭지을 수 없다. 사랑도 물과 같아서 언제 스며들었는지 모르게 스며든다. 그들에게 사랑은 알 수 없는 것,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시작과 완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있지만 구원파적으로 있지 않고, 없지만 무신론자처럼 없지 않다.

그런데 사랑의 소재로 한 서사들, 예컨대 소설이나 영화들은 대체로 돈오, 즉 구원파적 엄격성에 의지해서 줄거리를 전개한다. 서사의 매듭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장르적 특성상 불가피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이해한다. 계기와 각성, 혹은 인과관계가 일화들 사이를 연쇄로 잇는다. 그래야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물이 가죽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매듭 없이 전개되는 플롯이란 곤란하지 않겠는가. 계기와 각성의 연쇄로서의 서사 장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기와 자기의 연인의 사랑에 대해서 매듭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그것이 자기, 또는 자기의 연인의 사랑의 순수함, 또는 완전무결함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매듭이 특별할수록 사랑의 순수와 완전무결에 대한 신념은 견고해진다. 물론 미신이다. 미신일수록 맹목적이다. 그래서 연인들은 어떻게든 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기억하려 하고, 때때로 너무 희미하거나 복잡해서 기억이 불가능할 때는 사랑의 시점을 인위적으로 정하는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일도 생겨난다. 

 

그 순간에 세상은 현저하게 축소되었다. 그 땅에, 이 세상에, 당신과 그녀 말고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세상은 두 사람만 사는 공간이 된다. (...) 연인 이외 모든 사람들은 그저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연인은 연인 말고는 다른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랑은 세상을 축소시키는 기술이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의 세계는 두 사람만 존재하는, 아주 좁은, 이제 막 태어난 세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웃거리지 않는 것은 기웃거릴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하면 그, 그녀만이 유일한 인류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들해지면 세상이 조금씩 넓어지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점점 더 잘 보이고, 그리고 결국 한때 유일한 인류였던 그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다. 기웃거리기가 가능해지는 것은 기웃거릴 대상이 다시 생겨났다는 증거다. 만물이 그런 것처럼 사랑 역시 태어나고 성장하고 소멸한다.

 

사랑은 우연을 얹으려는 의지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한다. 왜냐하면 우연이 그 사랑에 숙명적인 성격을 주입하기 때문이다. / 당신은 우연이 여러 겹 중첩될수록 사랑의 숙명성 역시 증가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사랑의 숙명성이란,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당신의, 이해받기 어려운 감정 상태를 이해받을 수 있는 것으로 돌려놓기 위해 초대되어야 하는 일종의 명분, 또는 구실이다. 숙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정의에 당신은 기꺼이 기댄다. 더 많은 우연의 중첩은 더 많은 명분이고 구실이다. 더 많은 우연의 중첩이 요구되는 상태는 더 많은 명분과 구실을 필요로 하는 상태이고, 그것은 곧 그만큼 이해받기가 어려운 상대를 향해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대개의 사랑이 오해 (고전적인 장르의 예술에서 흔히 환상이라고 돌려서 말해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지 못한다. 아니, 당신의 무지는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사랑에 빠져 있다는 오해, 즉 환상이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인 오해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서른일곱 살의 사랑은 불가피하게 은밀할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마무리 짓는 당신의 생각을 당신은 연민에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젊음이나 늙음에 대한 인식이 자각적이고 또 상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서른일곱이라는 자연의 나이와 상관없이 젊음의 거침없음의 아름다움을 그저 부러워하는 당신은 이미 젊다고 할 수 없었다. 젊지 않다면 늙은 것이다. 서른일곱의 늙은이라니.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늙었는가. 그 질문에 그렇다고 선뜻 대답하기가 또 쉽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포기할 수 없는 목록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수 있었다. 써먹지도 못할 패를 버리지도 못하고 있는 어리석음이라고 해야 할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몸으로 춤을 권하는 외국 여자를 바라보며)

당신은 몸을 이용한 그런 식의 자기표현에 익숙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무엇을 이용해서든 자기표현을 잘하면서 살았던 것 같지 않았다. 저들은 몸 말고는 다른 활용 수단이 없어서 몸으로 자기를 표현한다고 당신은 조금 전에 생각했다. 그렇지만 정작 당신은 자기표현의 도구로 몸조차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어쨌든 그들은 무엇인가를 이용하여 자기를 표현하지 않은가. 당신은 그들을 연민할 처지가 아닌데도 연민의 감정을 가지려고 했던 조금 전의 당신이 무안했다. 타인을 연민하는 것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연민을 차단하는 가장 효과적인, 그러나 교활한 수단이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었다. 예컨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타인을 동정한다. 당신이 애처로워지지 않기 위해 누군가가 애처로워야 하는 것이다. 

 

(말은 무언가를 가리기도 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우월하고 이상적인 소통의 수단은 말이었다. 말을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은 몸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사를 전달하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되었다. 비논리적이고 불명확하고 두루뭉술하고 오해의 여지가 많은 몸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말이었다.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춤과 운동을 비롯한 일체의 몸동작에 대한 당신의 유서 깊은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다. 

/ 그러나 당신의 굳은 생각은 이국 땅에서 허물어졌다. 당신은, 몸은 알아들을 수 있었으나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물은 멀리 옮겨지며 세월처럼 지나간다. 죽음은 물속에 존재하는 것, 말하자면 항해다. 바슐라르가 한 말이에요. 아마 수장이야말로 가장 정결한 죽음일 거예요. 안 그래요?" / 물속은 따뜻하고, 또 아늑할 거예요, 하고 혼잣말을 했다. "욕조 속처럼." 그녀가 조용히 덧붙였다.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방파제나 바다나 달빛에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움직였다. 적어도 삶의 조건들이 그들을 지배하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바다가 욕조처럼 보이지도 않을 것이고 낮고 무거운 음악도 들리지 않을 거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독자가 이것을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이길 바라지만...)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의지를 강요할 수 없다.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처럼 읽는 사람은 읽고 싶은 대로 읽는다. 무엇보다도 얼마 전부터 서술과 이미지가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이 늘어놓는 서술과는 상관없는 이미지들이 듣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형성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당신도 알고 있듯, 서술과 이미지가 대결할 때, 서술은 결코 이미지를 이기지 못한다.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 한마디 하자면,  전쟁 이야기에 전투 장면만 나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 이야기에 사랑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진공 상태의 사랑 이야기는 없다. 사랑 역시,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어떤 사람도 상황과 조건의 구역 밖에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과 조건을 뛰어넘는 사랑을 할 수는 있지만 상황과 조건이 없는 무인도에서 사랑을 할 수는 없다. 아니, 무인도에서의 사랑이라고 해도 무인도라는 상황과 조건은 존재한다. 그러니 순수한 사랑 이야기에 대한 강박 때문에 자책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거기서도 다시 만난다면 보통 인연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렇게 덧붙임으로써 당신은 삶과 사랑에 개입하는 운명적인 것의 비중을 중시하는 당신 자신의 낭만적인 취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런 취향은 좀처럼 겉으로 표출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 이유는 그런 ㅊ취향에 포함되어 있는 어쩔 수 없는 치기를 당신 스스로 좀 쑥스러워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나타날까 나타나지 않을까를 궁금해하던 단순한 호기심이 어느 순간 나타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염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당신을 조금 당황스럽게 했다. 당신은 은근히, 사실은 자신도 모르게, 아니면, 당신 자신조차 속일 정도로 은밀하고 교묘하게 그 시간과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물의 위협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한다는 식의 얇은 명분의 가면 뒤에서 당신은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당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자유는 차압당한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는 사람은 곧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무리 기다리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기다리게 된다고, 아무리 여유를 부려도 항상 너무 빠르다고, 기다리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당신은 사랑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때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것일까... 시간은 더디 갔다. 

 

당신은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대단한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신화의 영역이 아닌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해할 이유가 없는 곳이 아닌가. 우연이든, 기적이든, 이곳에서라면 그저 일상에 불과할 뿐. 

 

당신과 당신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부터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고 지냈고, 급기야는 필요한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아니, 말을 하지 않고 지내자 필요한 말이 거의 없어져버렸다고 해야 할까. 불필요한 말만이 아니라 필요한 말조차 하지 않고도 불편하지 않게 되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아내가 전 애인 K를 보러 갔을 때) 당신은 조금 험한 밤을 보냈다. "집 꼴좋다." 당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 때 당신의 내부에는 집을 지키고 싶은 욕구와 집을 헐어버리고 다시 짓고 싶은 욕구가 충돌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지키고 싶은 집이 어떤 집인지 잘 알지 못했던 것처럼 헐어버리고 다시 짓고 싶은 집에 대해서도 또렷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신은 폭음으로 그 위기를 넘겼다. 그녀와의 접촉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당신이 그만큼 신중하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만큼 열정이 모자란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충동과 열정을 혼동하지 ㅇ낳았다는 점에서 신중하다. 그러나 충동이 제 노릇을 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당신의 열정은 함량 미달이다. 당신의 신중함, 혹은 함량 미달의 열정은 신호를 필요로 했다. 

 

술이 들어가자 그녀에게 품고 있던 당신의 감정이 이상한 형태로 굴절되어 표현되었다. 당신의 어투는 공격적이고, 집요해졌다. 예컨대 당신은 정신의 허영, 비극적인 포즈, 절망이라는 키치적 장식, 타인의 동정을 유발하기 위한 자기 연민 같은 어휘들을 마치 탄환을 날리듯 떠오르는 대로 퍼부었다. 

 

세상에는 통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K의 죽음을 전하는 아내) "물이 그의 몸을 받은 마지막 몸이었어요." 당신은 가슴 한구석이 뜨끔거리는 걸 느꼈다. 해묵은 임무가 당신의 눈을 시리게 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떤 역할을 하도록 임무를 부여받는다. 대상이 다르고 내용이 똑같이 않지만 그러나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때때로 의식하고, 때때로 의식하지 못한 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누군가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나면 전혀 다른 삶이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당신이, 타인의 시선을 닿지 않는 의식의 안쪽, 또는 욕망의 밑바닥에서, 거의 언제나, 너무나 간절히 소망해온 것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삶.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