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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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 - 견딜 수 없는 사랑

 

(사건의 시작)

우리는 한 팀이 아니었고 아무 계획도 없었으며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합의를 깰 일도 없었다. 실패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가 옳은 결정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합리적인 수순이었다고 다들 만족했을까? 우리는 결코 그런 위안을 얻을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 우리의 본성에 새겨졌고 이젠 거의 자동으로 소환되는 더 엄중한 약속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협력. 그것은 인류 초기에 사냥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바탕이자, 발전하는 언어능력의 동력이었고, 사회적 화합을 위한 도구였다. 그 사고 이후 우리가 느낀 고통은 우리가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줄을 놓는 것도 우리의 본성에 속하는 행동이었다. 이기심 또한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는 무엇을 주고 자신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 이것이 우리 포유류가 직면한 갈등이다. 그 선을 잘 지키는 것, 서로를 통제하고 통제받는 것이 우리가 도덕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칠턴스 언덕 위 3~4미터 상공에 떠 있으면서 '우리냐, 나냐'하는 해결할 수 없는 아주 오래된 도덕성의 딜레마에 직면했다. 

누군가 나라고 말했다면, 그 다음에 우리를 말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대체로 우리는 선이 합리적일 때 선하게 행동한다. 좋은 사회는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사회다. 기구 밑에 매달려 있던 우리는 갑자기 나쁜 사회 구성원이 되었고, 사회는 해체되고 있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갑자기 합리적인 선택이 되었다. 

 

나는 꿈을 꿀 때처럼 일인칭이 되었다가 삼인칭도 되었다. 나는 연기를 했고, 연기하는 나 자신을 지켜보기도 했다. 능동적으로 생각했꼬, 그 생각들이 화면에 자막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마치 꿈을 꾸듯, 내 감정적인 반응은 실재하지 않았거나 부적절했다. 나는 두 다리를 벌려 땅을 단단하게 디디고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있다는 것이 기뻤다. 저 멀리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생각이 자막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저 남자는 죽었다. 몸속에서 온기가 퍼져나갔다. 일종의 자기애였다. 나는 두 팔로 나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 필연적으로 이런 생각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다. 어떤 특정한 시점에 누가 죽고 누가 사느냐는 인간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우연히도 살아남았다. 재드 패리가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은 이때였다. 그의 길고 여윈 얼굴에 고통스러운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곧 벌을 받을 개처럼 불쌍한 표정이었다. 이 낯선 이의 맑은 청회색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던 그 1~2초 동안, 나는 살아 있음을 자축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그를 품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야겠다는 마음도 잠깐 들었다. 내 생각이 화면에 흐르고 있었다. 이 친구, 충격이 크군.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 

나의 이 눈길이 당시에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고, 나중에는 어떻게 해셕될 것이며, 그것을 기반으로 그의 마음속에 어떤 세상이 구축될지 알았더라면, 그를 그렇게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에 대한 '대화'로 사건을 '정리'하는 행위)

이젠 말이 봇물 터지듯 터져나왔다. 검시, 사건의 재구성, 상황 설명, 이것은 비탄의 반복인 동시에 공포를 쫒아내는 구마 의식이었다. 그날 저녁, 사건들과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 그리고 그런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갈고닦은 구문들과 단어들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우리가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말들이 단순한 서술에 그치지 않고 주문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와인잔의 무게와 송판 탁자의 결에서 편안함을 얻듯, 이야기의 반복에서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하다보니 공포스러운 부분이 나타났고, 처음에는 그것들을 마주할 수 없어 잠깐 건드렸다 물러서고, 다시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감방의 죄수들처럼 벽을 향해 달려들어 머리로 벽을 들이받았다. 감방이 천천히 커졌다. 

 

"의미가 있어야 해, 반드시." 그녀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망설였다. 이런 식의 생각을 좋아하지 않는다. 로건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이 우리가 충격을 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 때로는 착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기도 하는데, 그들의 선함이 시험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선함을 시험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친구들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

나는 친구들의 조심스럽고 지적인 얼굴이 침울하게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충격은 우리가 받은 충격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고, 선의에서 그 감정을 모방한 것으로 보여서, 나는 과장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실제 경험과 경험의 진술 사이에 놓인 심연을 잇기 위해 최상급 형용사의 밧줄을 던지고 싶었다. 클래리사와 나는 그후 몇 주 동안 거의 날마다 친구들과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수도 없이 떠들었다. 나중에는 내가 같은 표현과 같은 형용사를 같은 순서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그 사건들을 아주 조금이나마 다시 체험하는 듯한 느낌 없이, 심지어 기억에서 끄집어내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감정을 단어로 표현하며 감정을 정의한다) 

내가 생각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전에 쓴 마지막 문장은 "고의성과 의도가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였따. 이 문장을 썼을 땐 개에 관해 말한 거였는데, 다시 읽어보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 느낌을 설명할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더럽고, 오염됐고, 미쳤고, 물질적이지만 한편으로 도덕적인. 언어가 없으면 생각도 없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나는 생각과 느낌과 감각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표현할 말을 찾고 있었다. 죄책감이 과거에 대한 말이라면, 같은 관계에 있는 미래에 대한 말은 무엇일까? 의도 ? 아니다. 미래에 대한 영향력도 아니다. 예감. 미래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혐오감. 죄책감과 예감, 과거와 미래를 잇는 줄에 묶여 있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인 현재에서 회전하고 있는 느낌, 분명 두려움은 아니었다. 두려움은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고 대상이 있었다. 공포라는 단어는 너무 강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우려. 그래, 그거다, 우려. 

 

(감정과 생각을 날카롭게 정리하는 노력과 달리) 

- 쓰러졌던 꽃병을 다시 세우며 -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줄지 모른다고, 나를 보호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희망을 담은 속죄 행위, 광적이고 야생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힘을 막아내는 행위가 모든 종교와 모든 사고 체계의 바탕이라는 생각도 했다. 

 

오 하느님,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내가 클래리사를 얼마나 많이 생각했든, 그녀를 추억했든 기대했든, 다시 그녀를 경험하는 것은, 그녀의 촉감과 소리, 우리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감정, 대단히 동물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익숨함과 항상 가슴 설레는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그런 기억상실은 기능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비틀어 떼어낼 수 없는 사람들은 인생의 시련에서 실패할 운명이었고 유전적인 발자국을 남기지도 못했다. 

 

피로가 최고의 최음제가 될 때가 있다. 다른 모든 생각을 몰살시키고, 무거운 팔다리가 육감적으로 흐느적거리게 만들고, 관대함과 인정과 무한한 포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그물에서 놓여난 생명체처럼 각자의 하루에서 떼굴떼굴 굴러나왔다. 

 

(사고에서 먼저 손을 뗀 이는 누구였을까 생각하며)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아래쪽 도로에서는 교통체증이 시작되고 있었따. 이 일을 끝까지 살펴보기가 힘들었다. 진부하나 균형추 역할을 할 법한 표현들이 떠올랐지만 그런 표현들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한쪽에는 '산사태를 부를 최초의 돌멩이'가, 다른 쪽에는 '연대감의 해체'가 있었다. 제일 먼저 줄을 놓은 것이 도덕적으로 책임을 물을 만한 요인은 아니었다. 저울 바늘이 이타주의에서 자기 이익으로 기울었을 뿐이다. 공포였을까, 아니면 합리적 계산이었을까? 우리가 정말로 로건을 죽인 것인가, 아니면 단지 그와 함께 죽기를 거부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그와 함께 있었따면,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의 과잉이 곧 표출되며 '상대'의 감정까지 보살필 여유가 없어졌을 때) 

클래리사는 분노가 자신에게 향할 때 항상 그렇듯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조의 심리 상태와 그의 문제들과 딜레마의 욕구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만 것이다. 보호본능이 일기 시작하면 자신도 어쩔 수 없다. 그녀의 신중한 질문들은 그를 돕기 위해 설계된 것이었지만, 이제 그녀의 욕구는 무시당한 채 보답 대신 공격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욕구를 사펴줄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 스스로 알아서 하려고 하는데,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클래리사와 조는 다툰 적이 거의 없다. 특히 클래리사가 언쟁에 서툴다. 그녀는 원래 의도가 아닌 말, 왜곡된 진실, 혹은 전혀 진실이 아닌 말을 하도록 허용하거나 요구되는 교전의 규칙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내뱉는 적대적인 언사가 조의 사랑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받아왔던 모든 이의 사랑으로부터 그녀를 멀어지게 만들고, 꼭꼭 묻어둔 비열한 본성을 드러냈다고 느끼게 만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조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다. 처음에 감정이 분노로 바뀌는 속도가 아주 느리고, 그렇게 분노로 바뀌었을 때도 상황에 맞지 않는 지성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잊어버리고 득점을 올리지 못한다. 또한 비난에 대응할 때 자신도 비난으로 맞받아치는 대신 상세하고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대응하는 습관을 버리지도 못한다. 상대방이 갑자기 상관없는 말을 하면 쉽게 허를 찔린다. 짜증이 치밀어 자기주장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나중에 차분해지고 나서야 분명한 자기 논리를 떠올린다. 뿐만 아니라 클래리사에게 특히 가혹하게 굴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녀가 너무나 쉽게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화가 나서 한마디 하면 즉시 그녀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멈출 수 없는 연극에 캐스팅된 것 같은 상황이고, 끔직한 자유가 공기 중에 퍼져 있다. 

 

(페리의 편지 중... 세상에)

당신은 나를 내려다보며 내 미래를 결정하지 않고, 당신 뜻대로 나를 좌지우지할 힘도 없어요.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굳건하고 맹렬하고, '아니오'를 대답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당신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 당신을 소유하고 구원하는 사랑이에요. 다시 말해 나의 사랑은 - 그건 하느님의 사랑이기도 해요 - 당신의 운명이에요. 

 

(클래리사와 거리가 생기며)

우리는 한번 부딪치면 관계가 끝날 거라는 것을 느낀 것처럼 언쟁도 하지 않았고, 작은 일에서도 부딪치지 않았다. 딱딱하게나마 이야기도 계속 나누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 내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둔하고 단조롭게 울려퍼졌고, 모든 문장은 물론이고 모든 단어가 거짓이었다. 소리 없는 분노, 미세하게 퍼져 있는 자기혐오, 이런 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요소였고, 나의 색깔이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 마치 우리의 유령 같고 더 비열한 자아가 이해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두 손을 들어 우리의 얼굴을 가리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혹시 마주친다 해도 불안한 듯 바로 눈을 돌리곤 했다. 사랑에 빠진 이전의 자아들은 우리를 이해하거나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 그것이 있었다. 수치심, 그 당시 우리 가정을 지배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무언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의 목과 마음은 천천히 회복되고 더 강해지고 있었다. 확실히 사랑의 관성력과 둘이 화목하게 살아온 세월이 현재 상황보다는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이 비축한 힘이 있을 터였다. 지금 우리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참을성 있는 설명과 경청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나 외에 사람 = 타인) 

나는 익숙한 실망감을 느꼈다. 이젠 이간이 어떤 문제에 대해 타인의 동의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리는 절반만 공유되는 믿을 수 없는 인식의 안개 속에서 살았고, 우리의 감각 정보는 욕망과 믿음의 프리즘에 의해 왜곡되었으며, 그 프리즘은 우리의 기억까지도 왜곡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보고 이롭게 기억했고,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설득했다. 냉혹한 객관성은, 특히 우리 자신에 관한 냉혹한 객관성은 늘 불운한 사회적 전략이었다. 우리는 분개해 반쪽짜리 진실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후계자이고, 이 이야기꾼들은 남을 확신시키기 위해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수세대에 걸쳐 성공이 우리를 걸러내왔고 성공과 함께 우리의 결점도 나타났는데, 결점은 우마차가 다니는 시골길에 난 바큇자국처럼 우리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있따. 그 결점이 우리에게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것과 동의하지 못한다. 믿는 대로 보인다. 그것이 바로 이혼과 국경분쟁과 전쟁이 벌어지는 이유이고, 성모상이 피눈물을 흘리는 이유이며, 가네샤 신이 우유를 마시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과 과학이 그토록 용감한 사업이고, 바퀴나 농업보다도 위대한 놀라운 발명품이며, 인간 본성에 맞서는 인간의 인공적인 작품인 이유이다. 객관적인 진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없다. 바큇자국이 너무 깊었다. 객관성에서 사적인 구원은 있을 수 없었다. 

 

나 이전의 많은 사람처럼, 나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성공을 거둔 중산층 사람들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향정신성 물질이 술이라는 사실을 점차로 인정하게 되었다. 합법적이고, 사회적이고, 다들 중독되어 있어 약하게 중독된 사실을 쉽게 숨길 수 있고, 무한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너무나 다채롭고, 너무나 맛이 있는, 내 손을 들고 있는 술은 그 자체로 승리자이다. 

 

나는 두려움과 정교한 백일몽이라는 채색된 봉투에서 걸어나와 냉철한 결과의 세계로 들어가려 하고 있따. 하나의 행동, 하나의 사건이 또 다른 행동과 사건을 수반할 것이고, 그런 일은 기차가 내 통제를 벗어날 때까지 계속될 터였다. 

 

(클래리사 편지 중)

낯선 사람이 우리의 삶에 침입했고, 그후 제일 먼저 벌어진 일은 당신이 나에게 낯선 사람이 된 거였어. 당신은 그가 드클레랑보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아냈고, 그가 폭력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고 예측했지. 당신 예측이 옳았어. 당신은 단호하게 행동했고, 그 점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돼. 하지만 다른 것은? 왜 그 일이 일어났을까? 그 일이 당신을 어떻게 변화시켰지? 어떤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었을까? 그 일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지? 이런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이제부터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해. / 이 일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진 잘 모르겠어. 지금까찌 함께하면서 참 행복했는데.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서로에게 충실했고. 난 항상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어.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 

 

/드클레랑보 연구/

환자에게는 사랑이 "고립과 자폐를 동반한 삶의 방식이 되고, 그 안에서는 타인과의 일치 가능성이 사라진다. 그 환자들의 원치 않은 관심을 받는 피해자들은 최소한으로 괴롭힘과 당혹스러움을 경험하거나 가장 가까운 관계의 붕괴라는 비극을 겪는데, 최악의 경우에는 분노와 질투와 성적 욕구의 폭력적인 표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민감하거나 의심이 많고, 우월성을 강하게 느끼고,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사회적으로 무기력한 개인"에게서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공허한 삶을 사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항이 있다. 이들은 관계에 대한 욕구가 크지만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성적이든 감정적이든 친밀성에 관한 두려움도 이에 못지않게 크다." 

 


소설 속 주인공 조와 클래리사는 화해하고 나중에 아이를 입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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