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나아 도쿄> 소설 주인공 한주가 가장 좋아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 소설 [피부와 마음]을 읽기 위해 도서관을 배회하다가 창비에서 나온 <사양>을 찾아냈다. 중편 소설 [사양]뿐만 아니라 여성 중심의 단편들을 묶은 책.
수록작 목록 :
등롱
여학생
피부와 마음
아무도 모른다
눈 오는 밤 이야기
화폐
오상
비용의 아내
사양
향응 부인
등롱
오늘 밤엔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렇게 전등이 어두워서는 기분이 우울해져서 안되겠다,라고 하시며 세평짜리 타따미방 전구를 50촉의 밝은 전구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 식구는 밝은 전등 아래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아, 눈부셔라, 눈부셔, 하며 젓가락 든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꽤나 들떠서 신나하셨고, 저는 아버지께 술을 따라드렸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어차피 이렇게 방의 전구를 바꾸는 것 정도구나, 하며 가만히 스스로에게 타일러봤지만 그렇게 쓸쓸한 기분도 들지 않았고, 오히려 이렇게 소박한 전등을 밝힌 우리 집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주마등 같아서 아아, 엿보고 싶으면 엿봐라, 우리 식구는 이렇게 아름다우니까! 하고 정원에서 우는 벌레에게조차 알려주고 싶은 고요한 기쁨이 가슴에 복받쳐왔습니다.
여학생
결국 내가 한가하고 생활이 고생스럽지 않으니, 매일 몇백번 몇천번 보고 들으면서 생긴 감수성을 감당하지 못해 멍하니 있는 사이에, 그것들이 도깨비 같은 얼굴로 여기저기서 떠오르는 게 아닐는지.
플랫폼에 내려서는데, 왠지 모든 게 말끔해진다. 막 지나간 일을 조바심치며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다음을 생각하려고 안달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다. 텅 비어 있다. 그 당시 가끔 내 심금을 울린 것도 있었을 테고 괴롭고 부끄러운 일도 있었을 텐데, 지나가버리면 완전히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는 순간은 재밌다. 지금, 지금, 지금, 하며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는 동안에도 지금은 멀리 날아가버리고, 새로운 '지금'이 와있따. 육교 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면서 도대체 이게 뭔가 싶다. 바보 같다. 나는 좀 지나치게 행복한지도 모른다.
지나간 일은 모든 게 그립다. 가족이란 이상한 존재다. 타인은 멀리 떨어지면 차츰 더 희미해지고 잊혀가는데 가족은 더욱더 그립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나니 말이다.
우리의 고통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것. 이제 곧 어른이 되면, 우리의 괴로움과 외로움은 우스운 거였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추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완전히 어른이 되기까지의 그 길고 짜증나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홍역 같은 병인 걸까. 하지만 홍역으로 죽는 사람도 있고, 홍역으로 실명하는 사람도 있다.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우울하기도 하고, 화가 나서 발끈하기도 한다. 그중에는 발을 잘못 디뎌 아주 타락해서는 돌이킬 수 없는 몸이 되어 한평생 엉망진창으로 보내는 사람도 있다. 또 눈 딱 감고 과감히 자살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서 세상 사람들이 아아, 조금 더 살면 알 텐데, 조금 더 커서 어른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인데, 라고 아무리 아쉬워한들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괴롭고, 그래도 겨우 어떻게든 참고 뭔가 세상 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려고 열심히 귀를 기울여도, 역시 세상 사람들은 뭔가 탈 없고 무난한 교훈을 되풀이하며 자, 자, 원래 다 그런 거야, 괜찮아, 하고 달랠 뿐, 우리들이 언제까지나 부끄럽게 여기며 내팽겨친다. 우린 결코 찰나주의가 아니긴 하지만, 너무나 먼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기까지 가면 전망이 좋다고들 한다. 물론 그건 틀림없이 말 그대로 추호의 거짓도 없다는 걸 알지만, 현재 이렇게 격렬한 복통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 복통에 대해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하면서 그저 자, 자, 조금만 더 참아, 저 산의 정상까지 가면 끝이야, 라고 단지 그것만 가르칠 뿐이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잘못하고 있다. 나쁜 건 당신이다.
내일도 역시 똑같은 날이 오겠지. 행복은 평생 동안 오지 않는 것이다.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틀림없이 온다. 내일 올 거라고 믿고 자는 게 좋을 거야. 일부러 털썩, 큰 소리를 내며 이불 위로 쓰러진다. 아아, 기분 좋다. 이불이 차가워서인지 등에 적당히 서늘한 기운이 퍼져 순간 황홀해진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온다. 멍하니 그런 말을 떠올린다. 행복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갔는데, 이튿날 행복을 알려주는 기분 좋은 소식이 버리고 나간 집에 찾아온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 행복은 -
안녕히 주무세요. 저는 왕자님이 없는 신데렐라 공주. 제가 토오꾜오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이젠, 두번 다시 뵙지 않겠어요.
피부와 마음
"저기요, 내일은 어떻게 돼도 좋다고 결심할 때의 여자가 가장 여자답지 않나요?" / "여기 잠시 앉아 있는 사이에 왠지 딴사람이 돼버린 것 같아요. 이런 밑바닥에 있으면 안될 것 같아요. 전 마음이 약해서 주변 분위기에 금방 영향을 받고 익숙해져요. 전 천박해졌어요. 마음이 점점 하찮게 타락하고, 마치 벌써..." 저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습니다. prostitute, 그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여자가 영원히 입 밖에 내서는 안되는 말, 그리고 한번쯤은 반드시 그 생각으로 번민하게 되는 말. 완전히 자긍심을 잃었을 때, 여자는 반드시 이 말을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부스럼이 나서 마음까지 도깨비가 돼버린 실상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못생겼다, 못생겼다 하면서 매사에 자신 없는 척했지만 역시 내 피부만은, 그것만은 은근히 몹시 소중히 여겼으며, 그것이 나의 유일한 자존심이었음을 지금 깨달았습니다. 겸손이니 조신이니 인내니 하며 자부해오던 것들이 의외로 믿을 수 없는 가짜였던 거죠. 사실 저 또한 지각과 감촉에만 일희일비하며 장님처럼 살아온 불쌍한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각과 감촉이 아무리 예민해도 그건 동물적인 거고 예지와는 전혀 상관없어, 나는 정말 우둔한 백치에 지나지 않아, 하며 저 자신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전 잘못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전 자신의 예민한 지각을 왠지 고상하다고 여기고, 그걸 똑똑하다고 착각해 남몰래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전 결국 어리석고 머리가 나쁜 여자였던 거예요.
"많이 생각했어요. 저, 바보 같아요. 전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아무도 모른다 (일본 가면 들릴 과자점)
아실지 모르겠지만 *카게츠도우라는 과자점이 있어요. 네,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번창하고 잇어요. 이자요이 모나까라고 해서 밤이 들어간 모나까가 옛날부터 그 가게의 자랑이었죠.
다시 살그머니 복도로 나와 종종걸음으로 부엌문으로 달려가 게따를 아무렇게나 신고는, 내 꼴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정신없이 마구 내달렸습니다.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전 아직도 모르겠어요. 오빠를 따라가서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 말아야지,라는 각오를 했습니다. 세리까와의 가출사건 따윈 애당초 제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오빠를 한번만 더 보고 싶어, 그럼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오빠랑 둘이서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이대로 절 데리고 도망가주세요, 절 오빠 마음대로 해주세요, 라는 저 혼자만의 생각이 느닷없이 그날 밤 내내 활활 타올라 어두운 골목골목을 개처럼 잠자코 달렸습니다. 때로는 발이 걸려 비틀거렸지망 앞섶을 여미고는 다시 아무말 없이 계속 달렸습니다. 눈물이 마구 솟구쳐 지금 생각하면 뭐랄까,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어요. (돌아와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습니다.)
눈 오는 밤 이야기
새 언니, 제 눈을 보세요. 제 눈 속에 무척이나 아름다운 경치가 한가득 보일 거예요. / 언젠가 오빠가 가르쳐줬잖아요. 사람의 눈 속에서 방금 본 경치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요.
오빠의 이야기 따윈 잊었어요. 대부분 거짓말인걸요.
슌꼬의 그런 시시한 눈을 보느니 내 눈을 보는 게 백배는 더 효과가 있을 거야.
새언니는 오빠 눈을 보면 속이 메슥거린다고 그랬어.
(...)내 눈은 이보다 더 멋진 설경을 백배 천배 지겨우리만치 잔뜩 봐와서 뭐라고 해도 슌꼬 네 눈보다는 훌륭하지.
(...) 하지만 오빠 눈은 깨끗한 경치를 백배 천배 본 대신 더러운 것도 백배 천배 더 본 눈인걸요.
화폐
(군인 본인을 살려준 술집 여성이 자는 사이, 그녀가 안고 있던 갓난아기 등쪽에 돈을 쑤셔넣고는 황망히 도망가다)
화폐 : 그 어디에도 이렇게 좋은 덴 없어. 우린 정말 행복해. 언제까지나 여기 있으면서 이 갓난아이의 등을 따뜼하게 해주고 살찌워주고 싶어. / 친구들은 모두 똑같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상
남편의 유서 중 : 내가 이 여자와 죽는 건 사랑 때문이 아니오. 난 저널리스트라오. 저널리스트는 사람들에게 혁명과 파괴를 부추겨놓고선 항상 자기는 거기서 쏙 빠져나와 땀을 닦지. 실로 기괴한 생물이 아닐 수 없어. 현대의 악마지. 난 그런 자기혐오를 견딜 수 없어 스스로 혁명가의 십자가에 오를 결심을 했소. 저널리스트의 추문. 그건 전례 없는 일이지 않을까? 내 죽음이 현대의 악마를 조금이라도 낯뜨겁게 해서 그들을 반성케 하는 데 기여한다면 기쁘겠소.
참으로 시시하고 바보 같은 말이 그 편지에 씌여 있었습니다. 남자란 이렇게 죽는 순간까지 거드름을 피우며 의의니 뭐니 하는것에 얽매이면서 허세 부리고 거짓말하지 않으면 안되나요?
제가 아오모리에 피난 간 있는 동안 이 집에 드나들며 묵기도 했다가 임신을 했다나 어쨌다나. 그런데 겨우 그런 일을 가지고 혁명이니 뭐니 소란 피우며 죽다니, 저는 남편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혁명은 사람이 편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비장한 얼굴들을 한 혁명가를 저는 믿지 않습니다. 남편은 왜 그 여자를 좀더 공공연히 즐겁게 사랑하고, 아내인 저까지 즐겁게 사랑할 수 없었을까요? 지옥 같은 심정의 사랑은 당사자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무엇보다 남에게 폐를 끼칩니다.
마음가짐을 가볍게 확 바꾸는 게 진짜 혁명이지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뭐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닐 겁니다. 자기 아내에 대한 마음 하나 바꾸지 못하면서 혁명의 십자가라니, 나 참, 기가 막히는군, 하고 저는 세 아이와 함께 남편의 유골을 가지러 스와로 가는 기차 안에서 슬픔이나 분노보다도 너무나 어이없는 바보 같음에 몸서리쳤습니다.
비용의 아내
(가족에 충실하지 못했던 변명을 하는 남편) "이거 또 내 험담을 써놨군. 에피큐리언 가짜 귀족이라고 말이야. 이 녀석은 틀렸어. 신을 무서워하는 에피큐리언이라고 써줬으면 좋았으련만. 산짱, 봐봐. 여기에 나를 사람도 아니라고 써놨어. 이건 아니지.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내가 작년 연말에 여기서 오천 엔을 들고 나간 건 그 돈으로 삿짱이랑 아이가 오랜만에 즐거운 설을 쇠도록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야. 사람이니까 그런 짓도 저지르는 거라고. "/ 저는 별로 기뻐하지도 않고 "사람ㅇ치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잖아요ㅕ? 우리는 살아 있기만 하면 돼요." 하고 말했습니다.
사양
어머니는 행복을 가장하면서도 나날이 쇠약해져가고, 내 가슴에 살무사가 살고 있어 어머니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살이 찐다. 스스로 아무리 억누르고 억눌러도 살이 찐다. 아아, 이것이 단지 계잘 탓이라면 좋겠지만 나는 요즘 이런 생활이 정말 견딜 수가 없다. 뱀 알을 태우는 몹쓸 짓을 한 것도 그러한 나의 초조한 마음이 표출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 그저 어머니를 더욱 슬프게 하고 쇠약하게 만들 뿐이다.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다음엔 아무것도 못 쓰겠다.
이젠 더이상 황족이고 화족이고 다 없어져버렸지만 어차피 몰락할 운명이라면 화려하게 스러지고 싶다. 화재를 일으키고 그 사죄로 죽다니. 그런 비참한 죽음은 죽어도 끝나는 게 아니다. 아무튼 좀더 정신을 차려야겠다.
(전쟁에 대해서) 는 이 시처럼 /
작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재작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전해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냥 답답하며, 내 몸에 남은 것이라곤 이 작업화 한켤레의 허무함 뿐이다.
문고본에는 '트로이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스로마...)
뱀 알, 화재 사건. 그 무렵부터 어쩐지 어머니는 눈에 띄게 환자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나는 그와 반대로 점점 거칠고 천한 여자가 되어 가는 듯하다. 어쩐지 내가 자꾸 어머니의 생기를 빨아들이면서 살쪄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언어도, 지혜도, 사고도, 사회의 질서도,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동물들도 모두 가지고 있짢아요? 선앙도 갖고 있을지 몰라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며 으스대고 있지만 다른 동물과 본질적인 차이가 전혀 없어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어머니, 딱 하나 있어요. 잘 모르시겠죠? 다른 생물들에게 절대로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건 비밀이라는 거예요. 어때요?"
[나오지의 수기]
불에 타 죽는 듯한 기분. 괴로워도 괴롭다고 일언반구 외칠 수도 없는, 태고 이래 미증유의, 세상이 시작된 이래 전례가 없고 끝을 알 수 없는 지옥의 기분을 속이려 들지 마라.
사상? 거짓이다. 주의? 거짓이다. 이상? 거짓이다. 질서? 거짓이다. 성실? 진리? 순수? 다 거짓이다.
논리는 결국 논리에 대한 사랑이다.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아니다.
학문이란 허영의 또다른 이름이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고자 하는 노력이다. (니체 같네)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시시하다. 돈이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자다가 자연사!
전쟁, 일본의 전쟁은 자포자기다. 자포자기에 휩쓸려 죽는 건 싫다. 차라리 혼자 죽고 싶다.
남들에게 존경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하지만 그런 좋은 사람들은 나랑 놀아주지 않는다.
내가 조숙한 척하니 사람들은 나를 조숙하다고 수군거렸다. (게으름뱅이, 소설을 못 쓰는 척, 거짓말쟁이, 부자인 척, 냉담한 척)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괴로워서 나도 모르게 신음했을 때 사람들은 나를 괴로운 척한다고 수군거렸다. 왠지 자꾸만 다 어긋난다. 결국 자살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토록 괴로워하더라도 그저 자살로 끝날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프라이드란 뭔가, 프라이드란? 인간은, 아니, 남자는 '난 훌륭하다' '내겐 장점이 있지'등을 생각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까? 남을 싫어하고, 남에게서 미움 받는다. 지혜 겨루기.
흔들리는 차 안에서 나는 세상이 갑자기 바다처럼 확 넓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 애인 있어요." 어느날 나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듣고 외로운 심정이 되어 불쑥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연애도 사랑도 모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호소다 씨를 좋아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고, 취소하려고도 하지 않아 일이 이상하게 꼬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 무렵 내 배 속에 들어 있던 아기마저 남편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누구 하나 이혼이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꺼낸 사람은 없었지만, 어느샌가 분위기가 어색해져 난 오세끼와 함께 '친정어머니' 곁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를 사산한 나는 병으로 드러누웠고, 결국 야마끼와의 관계는 그걸로 끝나고 말았다. (세상에)
차라리 과감하게 본격적으로 불량하진다면 어떨까. 그러면 동생도 오히려 편안해지지 않을까?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라고 그 공책에 씌여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불량하고 외숙부도 불량하고 어머니도 불량한 듯 싶다. 불량하다는 것은 다정하다는 말이 아닐까?
MC (마이 체호프 > 이후에는 마이 차일드)
육년 전 어느 날, 제 가슴에 아련한 무지개가 떴답니다. 그것은 연애도 사랑도 아니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무지개 빛깔은 선명하게 더 진해졌꼬, 저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것을 잃어벌니 적이 없습니ㅏ. 소나기 지나간 맑은 하늘에 걸린 무지개는 이윽고 덧없이 사라져버리지만, 사람의 갓므에 걸린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부디 그분께 물어봐주세요. 그분은 정말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야말로 비 갠 하늘의 무지개처럼 생각하고 계실까요? 그래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거라고?
그렇다면 저도 저의 무지개를 지워야만 합니다. 하지만 저의 목숨을 먼저 지우지 않는다면 제 가슴의 무지개는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늙은 예술가가 청혼을 해왔을 때 / "말씀하신 그 행복이란 걸 저는 잘 모르겠어요. 건방진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체호프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아이를 낳아주시오, 우리의 아이를 낳아주시오라고 썼습니다. 니체에 에세이에도, 내 아이를 낳게 하고 싶은 여자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아이를 갖고 싶어요. 행복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돈도 필요하지만 아이를 키울 만큼의 돈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답니다."
참 난감한 여자. 그러나 이 문제로 가장 괴로운 사람은 저일 거예요. 이 문제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는 방관자가 돛을 흉측하게 늘어뜨린 채 이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저는 어설프게 무슨무슨 사상 따위를 말하는 것은 듣고 싶지 않아요. 제게는 사상이 없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사상이나 철학대로 행동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칭찬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모두 다 거짓말쟁이고 가짜라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잇어요. 저는 세상을 믿지 않습니다. 딱지 붙은 불량배만이 제 편입니다. 딱지 붙은 불량배. 저는 그러한 십자가에만은 못 박혀 죽어도 좋아요. 만인에게 비난받더라도 저는 당당히 반문할 수 있어요. 너희야 말로 딱지 붙지 않은 훨씬 더 위험한 불량배가 아니냐고.
기다림. 아아, 인간 생활에는 기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갖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것은 인간 생활의 불과 1퍼센트만 차지하는 감정일 뿐, 나머지 99퍼센트는 단지 기다리고 사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이 미어지도록 기다려도 헛수고.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너무나 비참하군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리지요. 너무나 비참합니다.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면서, 아아, 목숨을, 인간을,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요. 앞을 가로막는 도덕을 밀어낼 수는 없을까요?
"너는 [사라시나 일기]의 소녀로구나. 더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는." / 그렇게 말하며 내 곁에서 멀어져간 친구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친구에게 레닌의 저서를 읽지 않고 돌려주었다.
그때로부터 십이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나는 [사라시나 일기]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도대체 그동안 나는 뭘 했던가, 혁명을 동경한 적도 없었고, 사랑조차 몰랐다. 지금까지 세상 어른들은 우리에게 혁명과 사랑, 이 두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나쁜 것이라고 가르쳤다.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린 그대로 믿었다. 하짐나 패전 후 세상 어른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되자 아무래도 그들이 말하는 반대편에 진정한 살길이 있을 것 같았다. 혁명과 사랑은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맛있는 건데, 너무나 좋은 것이어서 어른들은 심술궂게도 우리에게 덜 익은 포도라고 거짓말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확신한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다.
아아, 이 사람들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내가 사랑을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살아야만 한다면, 이 사람들의 살기 위한 이러한 못브을 미워해선 안되겠지.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아아, 이 얼마나 참을 수 없고 숨이 끊어질 듯한 대사업인가.
"죽을 작정으로 마시고 있지. 살아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가 없어. 쓸쓸하거나 외롭고나 하는 그런 여유로운 감정이 아니라 그냥 슬퍼. 음침한 탄식의 한숨이 사방의 벽에서 들려올 때 자신들만의 행복 따위 있을 리 없잖아. 자신의 행복과 영광이 살아 있을 동안에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은 어떤 기분이 들까? 노력? 그런 건 단지 굶주린 야수의 먹이가 도리 뿐이야. 비참한 사람이 너무 많아."
희생자의 얼굴. 고귀한 희생자. 내 사람. 나의 무지개. 마이 차일드. 미운 사람. 교활한 사람. 이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너무너무 아름다운 얼굴처럼 여겨져, 사랑이 새롭게 되살아난 듯이 가슴이 두근거렸따. 그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쪽에서 키스를 했다. 슬프디슬픈 사랑의 성취. 우에하라 씨는 눈을 감으면서 나를 품에 안고 말했다. "내가 좀 삐딱했지. 난 농부의 자식이니까." 이제는 이 사람한테서 떠나지 말아야지. "전 지금 행복해요. 사방의 벽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와도 지금 저의 행복감은 포화점이에요. 재채기가 날 만큼 행복해요." 우에하라 씨는 후후 하고 웃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황혼이야." "아침이에요." 동생 나오지는, 그날 아침에 자살했다.
[나오지의 유서 중]
누나. 안되겠어요. 먼저 갑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요. 살고 싶은 사람만 살면 돼요. 인간에게는 살 권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을 권리도 있어요. 이러한 내 생각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너무나 당여ㅕㄴ한 것이고 그야말로 primative한 것인데 사람들은 공연히 두려워하며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뿐이죠.
살고 싶은 사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굳건히 살아가야 해요. 그건 멋진 일로 영예로운 관도 분명 그 곁에 있겠죠. 하지만 죽는 것 또한 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라고 하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햇빛 속에서 살기가 힘들어요. 살아가기에는 뭔가 하나가 결여되어 있어요. 부족해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나로선 안간힘을 쓴 거예요.
어느 시대에서나, 나처럼 이른바 생활력 없고 결함 있는 풀은 사상도 뭣도 없이 그저 스스로 소멸될 뿐인 그런 운명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내게도 조금은 할 말이 있어요. 아무리 애써도 살아가기 힘든 까닭이 제게는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은 모두 똑같다.
어쩐지 당신도 저를 버리신 것 같군요. 아니, 차츰 잊어가시는듯하군요. 하지만 저는 행복해요. 제가 바라던 대로 아기가 생긴 것 같아요. 이제 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배 속의 작은 생명은 고독한 미소의 씨앗이랍니다.
추악한 실책을 범했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아요. 이 세상에 전쟁이니, 평화니, 무역이니, 조합이니, 정치니 하는 것들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이젠 저도 알겠어요. 당신은 모르시겠지요. 그러니까 늘 불행한 거예요. 그건 말이죠, 가르쳐드릴게요. 여자가 좋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랍니다.
저는 처음부터 당신의 인격이나 책임감에 기댈 마음은 없었습니다. 저는 오로지 사랑의 모험을 성취하는 것만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소망이 이루어져 이제 제 가슴은 숲속의 늪처럼 고요합니다. 저는, 이겻따고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설령 남편의 자식이 아닌 아이를 낳ㄴ느다 한들, 마리아에게 빛나는 긍지가 있다면 성모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낡은 도덕을 태연히 무시하고 좋은 아이를 얻었다는 만족감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후에도 여전히, 기요띤 기요띤 하며 신사 숙녀분들과 술을 마시면서 데까당 생활인가를 계속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것을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겠어요. 그것 또한 당신이 선택한 마지막 투쟁의 형식일 테니까요.
술을 끊고, 병을 고치고, 오래오래 살아서 훌륭한 일을 하시라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인사치레 같은 말을 저는 더이상하고 싶지 않아요. '훌륭한 일'보다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이른바 악덕 생활을 계속하는 편이 오히려 후세 사람들한테서 감사의 말을 듣게 될지도 몰라요.
희생자, 도덕 과도기의 희생자. 당신도, 저도, 분명히 그런 존재겠지요.
혁명은 도대체 어디서 일어나고 있을까요? 적어도 우리 주변에서는 낡은 도덕이 여전히 그대로인 채 조금도 바뀌지 않고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어요. 바다 표면의 파도가 아무리 요란스러워도 그 밑바닥의 바닷물은 혁명은 커녁 꿈쩍도 않고 잠든 척 드러누워 있는 걸요. 하지만 저는 이제까지의 1회전에서 낡은 도덕을 조금이나마 밀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번엔 태어날 아이와 함께 2회전, 3회전을 치러나갈 작정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제 도덕혁명의 완성이랍니다.
향응 부인
사모님의 차표가 두쪽으로 찢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씁니다. 이것은 이미 집 현관에서 사사지마 선생을 만나는 순간 사모님이 몰래 찢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미치자, 사모님의 한없는 선량함에 어안히 벙벙해졌습니다. 더불어 인간이라는 존재는 동물과 전혀 다른 고귀함을 간직하고 있따는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요. 그래서 저도 오비 사이에 있던 제 차표를 꺼내 두쪽으로 쭉 찢고서 무언가 더 맛있는 것을 사려고 두리번거리며 열심히 시장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책
트로이카
안톤 체호프 - 벚꽃 동산
사라시나 일기 - 스가와리노 무스메
사냥꾼 일기 - 투르게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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