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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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부실하나 수려한 문장으로 인해 뭔가 나오겠지 싶어 계속 읽다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내가 왜 읽었지'하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땐 '이것은 한글의 덫!'을 외치며 분통을 터트린다. 거꾸로 흡입력 있는 스토리에 미쳐 날뛰는 문장이 더해진 책을 읽으면 '와 정말 이걸 누가 번역해? 한국문학 최고!' 매우 빠르게 이전과 상충하는 입장을 표명한다. 이 책은 당연히 후자였고 난 편혜영 작가의 모든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해외로 파견 나간 주인공이 언어 소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코로나 같은 역병이 퍼져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겪게 되는 기괴한 상황들을 담은 소설이다.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어. 정말 재밌으니 일독을 권합니다. 초기에 코로나 걸린 이들을 공개적으로 심판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동선, 상호명, 실명 공개...끔찍하다) 인간성 상실위기를 겪게 되는데 이 책은 정말 그 찜찜하고 저릿한 느낌을 쉬도 때도 없이 안겨준다. (그래도 정말 재밌습니다.) 내가 읽은 건 2010년작이 아니라 올해 나온 개정판이다.

 

“팬데믹을 겪은 후였다면 이 소설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삶을 폐허로 만드는 것은 역병과 쓰레기, 끊임없이 출몰하는 쥐떼가 아니라 적나라한 혐오와 차별, 정교한 자본주의임이 명백해졌으므로 다른 상상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 


 

그러니까 두 사람의 인생과 하등 상관이 없고 그 말을 한다고 해서 무엇도 바뀌지 않으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말들, 사소하고도 불필요해서 남들에게 바보처럼 들리는 얘기를 끊임없이 나누며 웃었고 같이 화냈고 일상을 나눠 가졌다. 그와 아내는 부끄럽거나 그립거나 되돌리고 싶거나 돌이키고 싶지 않은 지난 일을 여러 번 되풀이하며 이야기하면서 서로 닿아 있지 않던 시절의 목격자가 되어주었다. 사소하고 하찮아서 곧 사라질 시간을 기꺼이 함께 기억해 주었다. 남들에게 섣불리 말하기 어려운 각오나 희망에 대해서, 실행 의지에 대해서, 맥없이 꺾인 시도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럴 때는 과하지 않게 격려했고 소박히 위로했으며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그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의 고통은 앞으로 닥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금의 세계가 과거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었다. 

 

"차라리 병에 걸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병에 걸릴까봐 노심초사할 일도 없을 텐데요."

 

지나간 생애가 너무나 시시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고도 하찮은 일로 가득한 나날로부터 멀어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불행은 이처럼 사소한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서글픔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 

 

높은 감염률과 높아져가는 사망률과 개발되지 않은 백신 소식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면역력 높게 유지되고 있었다. 전염병이 도는 시기라고 해도 배워야 할 게 있었으며 진학할 상급학교가 있었고 그러려면 학교와 학원에 다녀야 했다. 수출할 상품이 있었고 적당한 마진을 붙인 수입품이 있었다. 사업의 지속을 위해 만나야 할 거래처 사람이 있었다. (..) 전염의 가능성은 높고 사망자는 점점 늘어갔으나 병에 걸릴지 아닐지, 병의 걸린다고 해도 죽을지 안 죽을지 모를 일이니 하던 일은 해야만 했다. 

 

"아무리 전염병이 돌아도 감염되어서 아프거나 죽어 나가도 일을 해야 하는 건 변함없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는 게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병에 걸려서 일을 망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합니다."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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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ohmy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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