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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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모든 작품을 읽겠다고 호기롭게 다짐했었는데 

2021.02.08 - [읽고 보고 듣는 재미/책을 읽고서] - 박완서 작품 목록 : 장편, 단편, 에세이, 인터뷰

매우 오랜만에 작가님의 책을 읽었다.  너무 좋은 책을 읽으면 마음이 압도 당해 최소 몇 주는 지나야지만 책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다. 언젠가 '나를 압도한 책들'에 대해 써봐야지.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은지 2주는 넘은 것 같은데 이제는 내 마음이 어느 정도 흡수한 걸까. 그럼에도 좋았던 문장들을 다시 필사하니 마음이 다시금 충격과 위로를 동시에 받아 비틀거린다. 

 

 

좋았던 문장들 :

 

 

올겨울도 많이 추웠지만 가끔 따스했고, 자주 우울했지만 어쩌다 행복하기도 했다. 올겨울의 희망도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다시 꿈을 꾸고 싶다. 절박한 현실 감각에서 놓여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꿈을 단념할 만큼 뻣뻣하게 굳은 늙은이가 돼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것도 모르고 오래도록 잔디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풀 냄새 때문만은 아니다. 유년의 뜰을 떠난 후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의 열 곱은 되는 몇십 년 동안에 맛본 인생의 단맛과 쓴맛, 내 몸을 스쳐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격렬했던 애증과 애환, 허방과 나락, 행운과 기적, 이런 내 인생의 명장면(?)에 반복해서 몰입하다 보면 그렇게 시간이 가버린다. 70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 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 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 준다. / 그 물소리가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상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여태껏 만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나에게 무엇이 되어 어떠게 살 것인가를 공상하게 했지만 살날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이 서글픈 나이엔 어릴적을 공상한다. 이 서글픈 시기를 그렇게 곱디곱게 채색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내가 만나는 아름다운 것들이 남기고 간 축복이 아닐까?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살날보다 산 날이 많은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1982년이여 안녕. 

 

나와 나의 어머니의 딸에 대한 모순된 생각은 매우 비슷하다. 그렇지만 나의 어머니와 내가 딸을 기르는 가르침에 있어서 똑같은 헛수고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한 여자이기에 감수해야 했던 온갖 억울한 차별 대우를 딸에게만은 물려주지 않으려는 어머니들의 진지한 노력과 간절한 소망에 의해 여성들의 지위가 더디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요 바닥에 엎드려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뭔가 쓰는 일은 분수에 맞는 옷처럼 나에게 편하다. 양말 깁기나 뜨개질만큼도 실용성이 없는 일. 누구를 위해 공헌하는 일도 아닌 일, 그러면서도 꼭 이 일에만은 내 자신을 던지고 싶은 일,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인 소설 쓰기를 나는 꼭 한밤중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하고 싶다.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있고, 알맞은 촉광의 전기 스탠드가 있고, 그리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라도 할라치면 여왕님이 팔자를 바꾸재도 안 바꿀 것 같이 행복해진다.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가 ‘윤슬 에디션’으로 새로이 독자들을 찾아왔다. 그가 남긴 에세이 660여 편을 모두 살피고 그중 베스트 35편을 선별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작품 선정에만 몇 개월이 소요된 만큼 박완서 에세이의 정수라고 칭하기에 손색이 없다. 초판 한정으로 독자들을 만나는 ‘윤슬 에디션’은 빛과 물의 반짝이는 순간을 포착해 화폭에 담아내는 영국 아티스트 고든 헌트의 작품을 표지 그림으로 사용했다. 시공간을 넘어 두 사람의 역동적이면서도 따뜻하고 다채로운 그림과 글이 맞닿아 책의 가치를 한껏 더한다. 조그만 진실이라도 가감 없이 전하고자 했던 박완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저자
박완서
출판
세계사
출판일
2022.06.30

 

 


 

올해 목표를 세우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월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 주기적으로 누군가를 탓하거나 화를 쏟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이 늘고 있다. 나의 선택으로 현재가 되었고 언제든지 난 충분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환경에 매몰되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벗어나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게 막는 이유들은 과연 나를 위한 것일까.  남을 위한 선택들을 그만해야겠다고 또 다짐한다. 희생, 공생 이런 단어들은 나를 죽게 만든다. 박완서 님의 문장을 읽으며 시간, 삶, 가족, 사랑 그리고 이 모든 것 이전에 나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더 알아야겠다. 글을 잘 쓰고 싶다. 일기를 써야겠다.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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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ohmy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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