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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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된 웃음의 힘과 위험과 미덕에 대해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사랑도 그에 비하면 우정이나 욕망, 또는 절망과 다를 바 없이 강력하지 않다.

난 아무것도 모르고, 뭘 알아본 적도 없어요. 부모님 집을 나왔을 땐 세상이 순리대로 굴러가는 것 같았거든요. (...) 그런데 그 후로 난 도처에서 부모를 찾고 있어요. 애인들한테서도 친구들한테서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아무 계획도 걱정도 없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잘 견디고, 잘 살고 있죠. 끔찍해요. 왠지 몰라도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즉시 내 안에 무언가가 삶과 조화를 이룬다고 할까요. 난 절대 바뀔 거 같지 않아요.

서로 간에 불꽃이 일어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다. 순식간에, 그들은 예전에 알았던 쾌락을 더는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육체의 한계를 잊었다. 수치심이라든지 담대함이라든지 하는 단어들은 그만그만하게 추상적이 되었다. 이제 한두 시간 뒤에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이 부도덕하게 여겨졌다. 그들은 이미 상대의 어떤 동작도 결코 불쾌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고, 육체적 사랑에 관해 서툴고 유치한 날것이 언어들을 재발견하며 소곤거렸다. 그들은 주거나 받은 쾌락에 대한 자랑과 감사를 끊임없이 서로에게 돌렸다. 또한 이 순간이 특별하다는 걸, 한 인간에게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보다 더 멋진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예기치 않았으나 이제는 필수적이 되어버린 육체적 열정이 - 하마터면 그들 사이에서 스치고 지나갈 뻔했던 - 진정한 이야기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루실은 말했다. "난 이제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널 볼 수 없어, 마음이 아프지 않고는 네가 떠나는 걸 볼 수 없고, 시선을 돌리지 않고는 다른 사람 앞에서너한테 얘기할 수 없을 거야."

조니가 어깨를 풀썩거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정말 좋아요. 당신은 아무 상관없겠지만, 난 당신을 정말 좋아해요." / "당신은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만 관심이 있으니까요. 나머지 사람들은 죄다 거북하기만 하죠."

그는 그녀에게 '왜 웃어요?'라고 묻지 않았다. 많은 은밀한 관계들이 이런 식으로 침묵과, 질문의 부재와, 되짚지 않은 문장과, 작정하고 선택한 평범한 단어, 너무 평범해서 엉뚱해 보이는 단어에 의해 발각된다. 어쨌든 루실과 앙투안의 웃음을, 그 행복한 표정을 처음 보는 누구라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들도 이를 막연하게 짐작했고 그들이 마음 놓고 서로를 바라보며 설렘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 얼마간의 순간을 어쩌면 오만하게 누렸다.

별안간 힘센 사랑 - 그와 동시에 행복한 사랑 - 을 발견했고, 자신의 존재가 오직 한 존재로 한정되기는커녕 무한해지고 채우기 불가능해지고 열광적인 존재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표 없이 흘려보냈던 그녀는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에 초조해했다. 앙투안을 사랑할 시간은 결코 충분하지 않을 터였다.

우수에 젖든 찬란하든, 추억에 잠기는 건 샤를이었다. 늘 샤를이 추억을 간직했다. 순간 루실은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감정적으로도 샤를에게 얹혀살고 있었고, 이 부분이 다른 무엇보다 곤혹스러웠다.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진실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가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 그녀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비겁했다.

그들은 늘 똑같은 작은 방에서 설레며 만났고,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고, 말을 나눌 시간도 거의 없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그들의 육체는 한없는 열광과 경애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 감정은 기억력이 순간의 격렬함에 의해 증발해버리는 절대적인 감정이어서, 헤어진 뒤에도 구체적인 기억을, 가령 어둠 속에서 속삭였던 말 하나, 또는 동작 하나를 절망적으로 더듬어보려 해도 허사인, 그런 절대적인 감정이었다. 그들은 거의 넛이 나가서 몽유병 환자들처럼 헤어졌다가, 그로부터 채 두 시간이 못 되어 그것만이 유일한 생존 요소, 유일한 현실이라는 듯 오로지 다시 만날 순간만을 기다렸다. 나머지는 전부 의미 없었다. 오직 이 기다림만이 그들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절 속에서, 다른 것들 속에서, 기다림 때문에 장애물이 되어버린 그 모든 것들 속에서 그들을 지탱해주었다.

몇 마디 농담이 오가고 몇 가지 추억이 소환된 뒤, 그녀는 그들에게는 직업과 애인과 경제적 걱정이 있꼬 그녀의 무사안일이 그들을 재밌게 하기보다는 언짢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돈의 장벽이 소리의 장벽이 되었다. 모든 말들이 대화 상대자에게 몇 초 뒤에나, 그러니까 너무 늦게 가 닿았다.

고독 속에서도 더러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있다. 위기의 순간엔 외부적인 어떤 것보다도 기억이 우리를 절망에서 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행복했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행복 - 우리가 누군가로 인해 불행할 때 그 누군가와 필연적이며 유기적으로 관련이 있어 보이고, 또한 그 누군가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복 - 은 실은 매끄럽고, 둥글고, 흠 없는 무언가로 더할 수 없이 자유롭게, 우리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물론 잠깐일 수도 있지만, 틀림없이 가능하다) 나타난다. 이 기억은 우리에게 이전과 다른 누군가와 공유했던 행복보다 더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다른 누군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와 공유했던 행복은, 실수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반을 두었던 허무한 기억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질투심이 거의 필연적으로 저속한 추론을, 행동을, 판단을 이끌어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질투가 났다 해도 그 주체가 앙투안인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결속되었고, 그들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충격으로 인해 심장이 뒤집히고, 텅 비어버릴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비어버리는 동시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에. 이 태양과 이 바다, 나아가 순전히 육체적인 안락이 이토록 중요할 줄이야. 예전엔 그녀의 행복을 그저 보충하던 것들이 이토록 중요할 줄이야. (...) 시간이 그저 죽여야 할 것이 아닌 다른 것, 애지중지하고 아끼고 지나가지 못하게 할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그들이 쾌락으로 맺어지고, 웃음으로 맺어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그들은 고통으로도 맺어져야 했다.

"그러니까, 루실, 언젠가 나한테 돌아와요. 난 당신을 당신 자체로 사랑해, 앙투안은 자기 짝으로서 당신을 사랑하지. 당신과 함께 행복하고 싶은 걸 거고, 그 나이엔 그게 맞아. 하지만 난 당신이 나와 무관하게 행복하기를 바라오. 기다리겠소,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니까."

루실은 신비롭고 기이한 병의 포로가 된 기분이었고, 그것이 행복이라는 걸 알았으나 그렇게 부르기가 망설여졌다. 똑똑하고 예민하고 비판적인 두 존재가 그 지경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그 지경으로 단단히 밀착되어서, 울먹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덧붙일 다른 말은 아무것도 없기에 단지 '사랑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느 것이 어떤 의미로는 터무니없게 여겨졌다. 그녀는 덧붙일 다른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것은 결국 우리가 충만함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실은 언젠가, 어느 훗날엔, 이 충만함의 기억을 넘어서기 위해 어찌하면 좋을지 의문이었다. 그녀는 행복했고, 두려웠다.

그들 사이엔, 심지어 가장 감미롭고 다정한 순간에도, 불안하고 난폭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그들은 더러 이 불안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혹여 그들 중 누군가의 가슴에서 이 불안감이 사라진다면 그건 동시에 사랑도 사라졌다는 의미라는 걸 막연하게나마 인식했다.

앙투안은 이따금 의문스러운 눈초리로 루실을 힐끔거렸다. 루실의 게으름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아무것에도 대비하지 않을 수 있는 엄청난 능력, 행복할 수 있는 재능 - 그토록 텅 비고, 무위하고, 그날이 그날인 날들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 이 그에게는 때로 괴이하다 못해 거의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모든 존재가 행복할 숙명이라는 걸 알았다. 행동은 삶이 아니라 어떤 힘을 허비하는 방식, 무기력이다.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체면, 모든 책임이 이 체면에 있다. 이미 얼마 전에 나는 깨달았다. 무위야말로 우리의 모든 미덕과 그나마 참아줄 수 있는 우리의 모든 자질 - 명상 , 한결같은 기분 유지, 게으름, 활발한 정신력, 육체적 소화력 - 을 드러낸다는 걸. 먹기, 배설하기, 육체관계 맺기, 햇볕을 쬐며 빈둥거리기. 이보다 더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과 비교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일부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숨쉬기, 살아있기, 그것을 인지하기. 이보다 더 나은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 윌리엄 포크너 [야생 종려나무]

그들은 싸늘했고, 서로에게 몸이 닿는 걸 피했다. 이 넓은 침대에서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기분이었따. 고독한 저녁 시간, 궁핍한 경제 사정,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보였다. 화염의 바닷속에서 원자폭탄이 발사되는 것이 보였다. 힘겹고 적대적인 미래가 보였고, 서로가 없는 삶이, 사랑 없는 삶이 보였다.

그가 원하는 건 오직 그녀, 혼자이고 불잡을 수 없으며 자유로운 그녀였다. 그들의 사랑은 늘 불안과 느긋함과 관능에 기대고 있었다.

"난 살아있소, 나의 루실, 비참하도록 살아있지. 물론 살아있다는 단어가 나보다 더 살아있는 느낌이긴 하지만. 요샌 일을 더 한다오. 내 집에서 혼자 살아갈 용기가 없어서 외출을 자주 하고."

"왜 날 아직도 사랑하죠? 왜?" /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지. 당신이 이해하든 말든 그건 정말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소. 그리고 당신의 행복하려는 의지도 사랑하고. 하지만 당신한텐 다른 매력이 있소, 그건... 도약이라고 할까. 당신은 어딘가로 걸어가는 중인 것 같은데, 실은 어디로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단 말이지. 일종의 갈망은 있는데, 아무것도 소유하려 들지 않고 말이오. 영원히 명랑할 것처럼 경쾌한데 막상 쉽게 웃지는 않고. 알다시피 사람들은 늘 사느라 바쁜데, 당신은 당신 때문에 바쁘단 말이지."

"어쨌거나 넌 더는 행복하지 않았어." "너도." 그들은 유감스러워하고 양해를 구하는, 거의 사교적인 묘한 미소를 교환했다.
루실은 걸어서 돌아왔다. 집으로, 샤를에게로, 고독에게로. 그녀는 자신이 삶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든 삶으로부터 영원히 박탈당했다는 것을 알았고, 박탈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____

사강의 설명에 따르면 루실은 존재 자체가 행복하고 (깨어나며 행복하고, 잠이 들면서 행복하다), 앙투안은 도덕적이나 불안한 영혼이며, 디안은 모두들 선망하는 사교계의 여왕이나 길을 잃었고, 샤를은 열정 덕분에 삶의 권태에서 구원받는다.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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