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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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이 부른 <트레일러거지>의 노래 가사는 북서태평양 연안의 작고 우중충한 도시에서 성장기를 보내는 기분을, 지루함에 서서히 질식당해 죽을 것만 기분을 그대로 표현해낸 것이었다. 이 밴드의 장작 11분짜리 곡들과,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오싹한 비명소리는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딱히 생각할 거리가 없을 때 훌륭한 배경음악이 되어 주었다.

 

이제 나는 기쁨과 긍정의 기운을 마구마구 내뿜을 것이고 그러면 엄마의 병이 나을 것이다. 엄마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입을 거고, 집안일을 군말 없이 싹 해치울 것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워 전부 해드릴 거다. 엄마가 시들어가는 것을 나 혼자 막아낼 것이다. 지금까지 엄마에게 진 빚을 낱낱이 갚을 것이고, 엄마에게 필요한 모든 거이 될 것이다. 내가 전혀 안 와도 된다고 생각한 걸 후회하게 만들 거다. 완벽한 딸이 될 테다. 

 

내 몸에 닿는 엄마 손길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살짝 끈적끈적한 크림기가 남아 있는 차가운 손은 더는 내가 화들짝 피하기 바쁜 불쾌한 손이 아니라 가만히 기대고 싶은 손이었다. 마치 엄마의 애정에 이끌리는 어떤 중심이 내 안에 새롭게 생겨난 것 같았다. 내가 그 자기장에 떠나 있었을 때까지 새롭게 충전된 중심이. 나는 또다시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동안 홀로서기하느라 좌충우돌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 엄마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고, 그걸 달콤하게 음미하고 싶었다. 스웨터를 세탁기에 돌려버려 두 치수 작게 쪼그라뜨린 일을, 점심을 먹으러 고급 식당에 갔다가 무료인 줄 알고 시켜 마신 탄산수에 12달러를 쓴 일을 재미나게 들려주고 싶었다. 엄마, 엄마가 옳았어,라고 순수히 인정하고 투항하고 싶었다. 

 

한 번은 차를 몰고 공항에 가서 멍하니 터미널을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온 적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그토록 여행하고 싶던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여기에 있지만, 이번에는 온전히 내 자유의지로 돌아온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 어둠 속으로 무작정 달아날 궁리를 하는 대신, 부디 어둠이 찾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 밤 엄마 옆에 누워 있으려니 어렸을 때 차가운 발을 녹이려고 엄마 넓적다리 사이에 슬며시 발을 끼워 넣던 일이 떠올랐다. 엄마는 부르르 떨면서 속삭였다. 널 편안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엄마는 어떤 고통도 감수할 거라고, 그게 바로 상대가 너를 진짜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 부츠가 떠올랐다. 내가 발이 까지지 않고 편안하게 신을 수 있도록 엄마가 미리 신어 길들여놓은 부츠가. 나는 이제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부디 내가 다신 고통받을 방법이 있기를,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엄마에게 증명할 수 있기를, 엄마의 병상에 기어들어가 엄마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키기만 하면 그 무거운 짐을 내가 송두리째 흡수해버릴 수 있기를. 인생이 공평하려면 자식 된 도리를 다할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 같았다. 엄마가 나를 자기 안에 품고 다닌 몇 달 동안 엄마의 온 뱃속 장기들이 나라는 존재에 밀려나 한 덩어리로 뭉쳐 있었고,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동안 엄마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그 고통을 보상하려면 지금 내가 이 고통을 대신 짊어져야 마땅했다. 그것이 외동딸에게 주어진 의례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가까이에 누워 있는 것밖에 없었다. 엄마의 지원군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규칙적으로 느리게 울리는 기계 신호음과 나지막이 쌔근거리는 엄마 숨소리를 들으면서.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나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 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 말. 엄마는 죽어가면서 나를 위로했다. 엄마의 모성이, 엄마가 느꼈을 테지만 능숙하게 숨겼을 무진장한 공포를 제압해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사랑은 행위이고, 본능이고, 계획하지 않은 순간들과 작은 몸짓들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이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우리 결혼이 좀 더 이상적인 환경에서 시작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내 앞에 놓은 미래를 용감하게 걸어 나가는 데 오직 이 남자 하나뿐이면 된다는 확신을 준 게 바로 이 시련이었다. 

 

엄마는 단순히 주부나 엄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두 역할을 독선적인 태도로 얕잡아보았다. 양육과 사랑을 택한 사람에게도, 돈을 벌고 창작 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얻는 만큼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예술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고동치는 사랑이었고, 노래 한 곡 책 한 권만큼이나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사랑 없이는 노래도 책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나란 존재가 엄마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신의 한 조각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냥 겁이 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병원 격리 생활로 변해버리기 전에 엄마가 나를 데려가려 한 곳이었다. 엄마가 나와 함게 만들려던 마지막 추억이고, 엄마가 나를 키우며 내가 사랑하도록 만든 것의 원천이고, 내가 기억했으면 하는 맛이고, 내가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이었다.

 

내 기억을 곪아터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트라우마가 내 기억에 스며들어 그것을 망쳐버리고 쓸모없게 만들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 기억은 어떻게든 내가 잘 돌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잘 붙들고 키워 내 안에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교훈을, 내 안에, 내 일거수일투족에 엄마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언젠가 후대에 잘 전할 수 있도록. 나는 엄마의 유산이었다. 내가 엄마와 함께 있지 못한다면 내가 엄마가 되면 될 터였다. 

 


7월의 김영하북클럽 선정 책, H마트에서 울다 - 미셸 자우너

미셸 자우너는 미국父, 한국母 사이에 태어난 미국인으로 재피니스 브렉퍼스트 밴드의 기타리스트/보컬이다. 엄마의 암 투병과 이별, 애도의 시간을 담은 에세이. 책을 다 읽은 후 애플뮤직에서 그의 음악을 오래오래 들었다.

 

나는 나의 엄마를 매우 닮았다. 내 삶은 그의 또 다른 삶이라 생각할 정도로 닮았다. 늘 일을 하고, 늘 공부를 한다. 책을 끊임없이 읽고 자연을 사랑한다. 내면 또한 많이 닮았다. 불안감과 자기만족 사이에서 늘 흔들리며 신뢰와 사랑이 근본이라 타인은 쉽게 천국이자 지옥이 된다.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 알기에 각자 잘 살고 행복하려고 노력한다. 스스로 그럴수록 상대 또한 잘 살고 행복할 거라고 믿는다. 엄마를  매우 그리워하며 읽었다. 늘 보고 싶고, 늘 사랑하는 엄마를.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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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ohmy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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