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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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가 있는 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이 구축해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의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입장)'를 수용한 것이다.


병에 걸린 이유, 병에 걸린 자신의 몸과 일상을 삶 전체에 걸쳐 통합적으로 설명해내고자 하는 관심은, 병에 걸린 사람들이 각자 써 내려가는 인생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법은 병에 걸린 이들을 보호하고 치료하고 복지라는 이름으로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개인들이 힘들게 구축해온 자기 서사와 나름의 이론을 종종 철저히 무시한다. 이런 '잘못된 삶'들은 법 안에서 구체적인 서사를 가진 개인으로 전재하지 못한다. 실격당한 삶이 된다.

어떤 사람을 존엄한 존재로 대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인생의 자율적인 형성 주체, 말하자면 작가/저자 author로서 존중함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는 현대 입헌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질서가 인간의 존엄을 정의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입장이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 독일의 연방헌법재판소를 비롯한 각 나라의 최고 법원은 그와 유사한 견해로 인간의 존엄을 정의하고 있다.
→ 독일연방헌법재판소 : 인간 존엄의 토대가 되는 인간상 menshenbild을 정리하면서 "인간을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하며 스스로를 발현하는 소질을 부여받은 정신적, 윤리적 존재로 보는 관념"에 기초하여 헌법상 인간 존엄 규범을 이해한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 : 헌법이 정의하는 인간상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 사회관을 바탕으로 사회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생활을 자신의 책임 아래 스스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동시에 "공동체에 관련되고 공동체에 구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로 인하여 자신의 고유가치를 훼손당하지 아니하고 개인의 공동체의 상호연관 속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인격체"이다.

[발달장애 당사자에게 대화의 형식이 아닌 오늘이 무슨 요일이에요, 몇 일이에요, 이름 한 번 써보세요 등의 질문 만을 한 국민연금공단 심사 과정 에피소드] 이들의 복잡하고 고유한 삶의 이야기, 배경, 몸의 경험이 무엇이든 오로지 법은 (효과적이고 강제적이지 않은) 서비스를 받고 싶다면 정신질환자로 스스로를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법의 보호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바로 그 보호가 필요한 이유인 '속성' 또는 '배경' 안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온전히 구겨 넣으라는, 즉 지체장애와 발달장애 그 자체로만 존재를 쪼그라트리라는 요청이다. (...) 헌법은 개인이 고유한 저자성을 갖기 때문에 존엄하고, 그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자유권, 평등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등이 필요하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정작 그 권리 보호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존엄의 핵심인 저자성을 침탈당해야 하는 셈이다.

저자성이 '법 앞에서' 철저히 무시된다면 이를 개선할 방법은?
현대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되기를 요구하는 '커버링covering' 압력이 존재.
→ 커버링에 대한 법적인 대응 방법 예시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 reason-forcing conversation'
네가 가진 장애, 성별 등을 티내지 말라. >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라. > 우리 회사에서는 보청기를 가려달라. > 왜 그래야 하는가. > 고객들이 불편해하니까. - 주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요구를 할 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원래 여기서는 이렇게 해라고 말하면 그만인 경우가 많다. 법이 그 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철저히 제시하게끔 강제하거나 유도할 필요가 있음.


2005년 1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 제정 : 제3조 (이동권) _ 교통약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호 받기 위하여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 / 장애인이 자신의 이동할 권리를 발명하고, 이를 법제도에 진입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이동해서 거리로 나와야 했다. 이는 권리가 법제도 안에서 국가권력의 힘을 통해 인정되어야만 실질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 자신의 신체나 정신 혹은 처한 사회적 상황의 문제를 권리의 언어로 표현하고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법제도 안으로 진입시켜 실질적인 힘을 갖도록 정치적, 도덕적, 헌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된 삶'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다.

합리적 편의 제공 /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장애인에게 모든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의 향유 또는 행사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것이 요구되는 특별한 경우, 불균형하거나 부당한 부담을 지우지 아니하는 필요하고 적절한 변경과 조정을 의미한다. (예. 식당 계단에 슬로프 설치, 시각장애인이 시험을 볼 때 점자 시험지 제공 등) 편의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부당한 부담'까지 지우지만 않는다면, 편의 제공의 책임이 있는 사람은 합리적인 편의를 제공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성립될 수 있다.
> 죄 없는 식당 주인, 건물주까지 장애인을 위해 이런 책임을 져야 할까?
> 합리적 편의 제공은 그동안 사회의 제도, 문화, 물리적 구조나 토대가 장애인에 대한 고려 없이 설계되고 실천되다가 그 상태로 고착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장애인이 기회를 균등하게 누리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 기초한다. 계단으로 가득한 건물과 지하철, 야근과 회식이 잦은 직장 문화, 조금 느린 의사소통을 참지 못하는 우리의 성향, '품격'있는 움직임이 아니라면 멸시하고 배제하는 집단의식 등이 오랜 시간 누적되어 장애인의 몸을 붙잡고, 입을 막고, 눈을 가린다. 즉 장애인의 삶은 복지서비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장애인의 자유와 평등이 오랜 시간 축적된 획일적인 관행과 구조에 의해 직접 침해당하고 있다고 간주된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합리적 편의 제공 의무를 정당화한다.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저 장애인을 배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그 신체적, 겅신적 특성을 가지고 오랜 기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존중하라는 요구와도 같다.


장애인의 신체에 부여된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에 대한 관심은 '타자'의 숭고함에 대한 관조와 사색의 과정이다. 관조가 가능하려면, 그 대상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 (예. 닉 부이치치 이야기에 감동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지만 특수학교 설립은 반대하고 윗집에 장애인이 이사 오는 것은 반대)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나의 삶과 무관한 장애인의 신체, 주름지고 지혜가 가득한 노인의 얼굴, 아침 일찍 출근해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의 땀방울 같은 것.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는 자기기만을 불러온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 삶으로 들어올 때면,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충동이 우리를 괴롭힌다.

사람들은 자주 '장애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장애가 현실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의 몸이 현실이다. 장애를 둘러싼 현실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많은 입장, 태도, 관행, 오래된 습속, 누적된 혐오, 부족한 상호작용의 경험, 변화 가능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 의료적으로 재단되고 분류된 병명들로 가득 차 있다.

신체를 혐오하거나 피하고, 그에 무심하거나 편견을 갖고, 그것을 욕망하는 모든 일은 단순하고 1차원적인 반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체에 대한 혐오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부정이고, 그에 대한 무심함이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아닐까?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고 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에이블리즘 ableism : 장애차별주의 / 비장애인중심주의 _ 사회의 구조, 문화적 관행, 도시의 각종 인프라, 사람들의 상호작용 형식 등이 장애가 있는 다양한 몸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표준적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정치적 임이자 태조의 총체.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무시와 냉대 속에 혼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보는 미적, 정치적 실천, 그런 것들이 모여 자기 삶의 조건을 수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탁월한 자아를 구축하게 한다. 그러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을 언어화하고 법적인 권리로 만들고, 품위와 겉모양만 중시하는 품격주의자들의 세계에 구멍을 낸다.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은 이제 법률이 되고, 헌법이 되어 우리 공동체의 최고 규범이 된다. 그런 규범에서 자라나면 (...) 존엄의 순환이 시작되고,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1급 지체장애인인 변호사 김원영이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삶, 실격당한 인생이라 낙인찍힌 이들의 삶을 변론하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는 소수자들이 삶에서 만나는 연극적인 순간들, 즉 차별과 배제, 수치와 모욕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노련하게 맞받아치고 우아하게 대응하는 태도가 놓인 딜레마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저자는 거짓된 연극을 집어치우라고 하기보다는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과 인류학자 김현경의 논의를 빌려와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연극적인 상호작용이 인간의 존엄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홀로 고통을 감내하던 개인이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존엄한 인간으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부모, 형제자매, 친구, 연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이 존엄한 인간임을 확인한 소수자들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변호사이자 국가인권위원회 장애차별조사관으로 일했던 저자는 법의 문지기로서 차별당하는 이들을 만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법과 제도가 보호와 치료, 복지라는 이름으로 인간 존엄의 가장 기본적 전제인 개개인의 고유한 서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한 사람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온전히 지닌 채 써온 인생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 지켜봐줄 수 있는 시선이 있다면, 그런 무대가 모두에게 주어진다면 실격당한 존재들도 아름답고 매력적일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저자
김원영
출판
사계절
출판일
2018.06.15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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