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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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허지웅 님의 말과 글을 늘 좋아했다. 버티는 삶의 관하여, 그가 나온 마녀사냥도 다 챙겨볼 정도로 그의 배려 있는 말솜씨와 상반되는 날카로운 글솜씨의 조화를 좋아했다. 더욱 멋진 사람이 된 그가 써내려간 문장들 덕에 '나음, 배려' 등의 내면의 나침반이 조금 더 견고해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밑줄 친 문장들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블로그에 남긴다. 

 

 



희망은 불행에 대한 반사작용 같은 것이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 반드시 희망도 함께 있다. 부디 나보다 훨씬 따뜻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며 함께 내일을 모색해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되길. 그리고 행복하길.

나의 사연이 나의 책임을 대신 져주지는 않는다. 그런 괴물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불행과 함께 살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자기혐오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 물론 사랑으로도 살 수 있겠지만 그건 여건이 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세요 사랑하세요, 같은 말을 떠벌이며 거만할 수 있는 건 대개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별일 없이 잘 산다.” - 버티는 삶에 관하여 중. 

불행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다만 무엇을 얻게 되든 그것은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과 태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도처에 불행이 있다. 불행은 발견되는 것이고 행복은 주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걸 측정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청년들이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누군가의 속내를 쉽게 측정할 수 있다거나 특히 순수성과 양심을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주의해라.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익을 위해 멋대로 누군가를 천사로, 악마로 단정하고 몰려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자들. 우리가 정의롭다며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 그런 자들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입체적이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 피해자는 그냥 피해자다. 착한 피해자도 나쁜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불필요하다. 그런 말을 하는 자에게는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숨은 의도가 반드시 있다. 

영원회귀와 아모르파티는 이 삶이 영원히 똑같이 반복된다 할지라도 주체적으로 끌어안고 긍정하며 살아내겠다는 자기 선언이었다. 위버멘쉬는 이를 실천하는 인간이다. 나아가 내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만큼 제대로 바뀌고 극복하며 살아내겠다는 이야기다. 즉,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란 자기 삶을 향한 주체적인 긍정으로부터 나온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나는 삶이 뭔지 모를 때 글을 썼습니다. 이제는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쓸 게 없습니다.삶은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쓴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 중 

니체는 정확히 바로 그 공포에 맞서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운명론적 공포를 극복하고, 반복되더라도 좋을 만큼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이상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때가 밑바닥인 것 같습니다. 거기 이르고 나면 여기서 더 망해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 생존을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됩니다. 배고픈 건 주워 먹으면 되고, 기분 나쁜 건 내가 못났으니까 하고 넘기면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뭐든 할 수 있고 또 뭐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댈 수 있는 신적 존재도, 제도적 안전장치도 없이 혼자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피폐해진다. 싸우기 위해 거칠어진다. 불신만 남는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사람들끼리도 상대를 증오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상대에게서 발견했을 때, 우리는 공감과 이해보다 질타와 선 긋기를 우선하기 마련이다. 버티어 살아남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끝내 우리가 싸웠던 어둠 안에 갇히고 만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남은 탓에, 타인의 도움도 받는 방법을 잊은 것이다. 

피해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그 기초부터 파괴한다. 

피폐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는 늘 자조와 비관이기 마련이다. 어느덧 나는 완전무결한 피해자라는 생각안에 안도하며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한 자력구제의 수단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늘 옳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다. 

내가 직면한 실패가 자연스런 결과로써의 실패인지, 혹은 의도에 의한 음모와 배신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나라는 인간의 형태는 눈앞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영화 : <J. 에드가>와 <더 포스트>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마크 펠트 : 백악관을 무너뜨린 남자>, <닉슨> 순서대로. 

국가 폭력은 서로 돕는 자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공동 범죄라는 말로 묶인 이들의 삶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망가져 있다. 공동정범은 하나의 범죄를 각자가 분담하여 이행하였지만 각자가 전체에 대해 형사책임을 진다는, 즉 기소된 내용에 관해 모두가 같은 처벌을 받았다는 의미다. 

다큐 : <공동정범> <두 개의 문>

뜨거움은 삶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 정작단 한 번도 채워주지 못했다.

예민함은 더 많은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꼭 그만큼 공연한 슬픔을 안겨주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평균의 삶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고 또 그런 가르침을 자식에게 전수하려 애쓰는 것은 세상이 자신과 다른 것에는 얼마나 끔찍하고 반응하는지에 관해 평생 동안 학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 <아웃사이더> 스티븐 킹

부디 평안하기를.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삶은 일곱 가지 장면으로 요약하라고 했을 때 나라면 무얼 골랐을까.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 여아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개인사에서도 그렇고 국제정치에서도 그렇다. 스스로를 변치 않는 피해자로 설정하고 그러므로 옳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정치의 근성은 이 시대의 가장 비뚤어진 풍경 가운데 하나다. 당장 이기기 좋은 전략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사람을 망친다.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관계가 이어졌다가 끊어지기까지의 과정에서 명확한 건 오직 시작과 끝뿐이다. 나머지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나는 행복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매대 위에 보기 좋게 진열해놓은 근사한 사진과 말잔치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아마 행복이라는 건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증명해나가는 어떤 것일 테다.

사사로운 이익에 헐값으로 팔려 다니지 않기를 바란다. 확실히 말한다. 너 혼자서는 세상 못 바꾼다. 청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근사한 수사에 현혹되지 말아라. 마케팅이다. 

 

 


데이지

오마이라이프 인스타그램 | 북스타그램 | 유튜브

daisy@ohmy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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