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728x90
반응형

 

20대 초반, 누군가와 영화 얘기 중 "화양연화는 꼭 30대에 봐야 해."라는 말을 들었다. 그 후 수년간 아래 포스터 사진을 마주칠 때마다 '30대에 꼭 봐야지.' 생각했다. 인생영화로 꼽는다는 글을 볼 때마다 SNS에서 찬양하는 스틸컷들이 올라올 때도 꿈 참고 기다렸다. 어차피 세상에 볼 영화는 너무 많았고,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때 꼭 봐야 하는 영화와 책'이 무엇인지 얼핏 알았기 때문인 것 같다. 30대의 내가 센과 치히로를 보며 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이 지나 나는 올해 서른 한 살이 되었다. 그리고 어제 75인치 LG OLED 티비가 도착했다. 티비 없이 자란 내가 티비라니. 티비가 있어야 할 공간을 늘 거대한 책장들로 가득 채웠던 부모님 영향으로 앞으로도 내 인생에서는 티비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영화 전공 애인을 만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 왓챠를 연결하여 영화를 골랐다. 때마침, 왓챠가 왕가위 감독의 모든 영화를 4K 마스터링으로 들여왔다. 볼 때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본 후 그 잔상에 아직도 흔들리고 있으며, 이 느낌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글을 남긴다. 

 

 

화양연화, 2000

 

영화 배경 : 1962년의 홍콩. 중국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실패로 상해 자본가들이 영국 식민지인 홍콩으로 많이 이주하였다. 실제 왕감독 또한 1958년 상해에서 태어나 1962년에 홍콩에 이주하였다. 사람들이 오고 가며, 낯설면서 이웃과의 정을 원했던 왕 감독의 유년기가 담겼다고 보는 해석이 많다. 영화 후반부, 1996년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캄보디아를 방문한 뉴스 클립이 삽입된다. 캄보디아는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지만, 캄보디아 왕족과 국민이 열렬히 이들의 방문을 환호한다. 1997년, 영국은 홍콩의 지배권을 잃고 중국에 반환하였다. 캄보디아가 프랑스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홍콩인도 영국 시절을 그리워하는 걸 빗댄 것 같다. 이는 제목과도 연결된다.

 

화양연화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

 

 

 

 

신문사 편집기자인 양조위. 늘 포마드 머리, 넥타이 맨 양복에 담배를 피우며 무협소설을 쓰고, 장만옥은 무역회사의 비서로 화려한 치파오를 입고 다닌다. 양조위의 부인과 장만옥의 남편은 자주 집을 비우기에 두 사람은 자주 마주친다. 그리고 양조위가 메는 넥타이에서, 장만옥이 들고 다니는 백을 보며 본인의 아내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버림받은 시간을 우연히, 고의적으로 함께 보내게 되며 배신당한 마음과 도덕성 사이에서 흔들리게 된다. "우린 그들과 달라요." 영화 끝까지, 그 어떠한 입맞춤이나 드러내는 멜로 장면이 없지만 그들의 눈빛과 대화로 이미 우리는 그들을 연인이라고 정의할 수 밖에 없다. 

 

 

 

 

서로에 향한 마음을 인정하며 배우자들도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외도했을거라는 결론을 내리며 위안도 삼아 본다. 그렇지만 우린 다르다며, 떳떳하다며 끝까지 서로의 더 많은 것을 갈망하지만 어떠한 선도 넘지 않는 둘. 그렇게 서로에게 고통과 위로의 존재가 되지만 존엄성을 지키고, 함께한 시간을 아름답게 지키기 위해 아무 일 없이 이별한다. 

 

 

 

 

첫 장면부터 끝까지, 단 1초도 허투루 쓰이지 않은 느낌이 들 정도로 영상미와 음악이 아름답다. 양조위의 반듯한 비주얼, 장만옥의 치명적인 매력에 '아름답다, 멋지다' 말이 모든 등장 장면에서 나왔다. 특히 장만옥은 21벌의 치파오를 입었다는데 어떻게 사람이 저리 우아하고 아름다울까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물론 연기력은 말할 필요도 없이 뛰어나다. 손 한번 겹치는 것에 얼마나 큰 떨림을 느꼈던지. 영상미, 음악, 배우, 대사... 동료들에게 웃으면서 "20대에 봐도 인생영화일 것 같은데." 후기를 남겼다. 

 

 

 

 


감독의 제작 비하인드 :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의 전작 [아비정전]의 정신적인 후편이라고 한다. 대중에게 외면당하여 속편 제작에는 실패하였지만, 장만옥은 아비정전에서의 인물과 같은 이름, '소려진'으로 연기한다. 양조위는 화양연화를 칸에 제출하고도 상영 전까지 촬영하고 편집했다고 한다. 원래의 예정된 결말은 양조위가 장만옥에게 이별을 고한 후 싱가포르에 떠난다. 장만옥이 그를 찾아내서 밤을 함께 보냈을 때 양조위는 "이건 복수다. 당신도 내 아내와 다를 바 없는 여자다."라고 말한다. 장만옥은 양조위의 아이를 갖게 되어 키우고, 몇 년 후 지인의 결혼식에서 장만옥을 마주친 양조위는 후회한다. 이 결말은 칸 출품 마감에 쫓기는 바람에 실행되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베드신도 있었으나 영화의 취지에 맞지 않다는 감독의 판단 하에 삭제되었다. 

 

 

 

 

 

관계의 이름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건 나이가 들수록, 아픔을 겪거나 목격하며 알게 된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어 이 영화를 보라는 말이 나온걸 수도 있겠다. 아픔을 무덤덤하게 지나치기 위해 그들은 미리 이별을 연습해본다. 예견된 이별임에도 고통은 너무 크기에 "바보 같이 왜 그래요, 진짜도 아닌데. 울지 말아요."라며 위로한다. 

 

 

 

명대사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버렸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들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사라져버린 세월은 한 무더기 벽과 같다. 먼지 쌓인 유리 벽처럼 볼 수는 있어도 만질 수는 없다. 그는 줄곧 과거의 모든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만약 그가 먼지 쌓인 벽을 깨뜨릴 수만 있다면, 그는 이미 사라진 세월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두 사람의 시작이 궁금했었는데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오늘부터 1일 1 왕가위.

 

 

 

 


데이지

오마이라이프 인스타그램 | 북스타그램 | 유튜브

daisy@ohmylife.co.kr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