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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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비밀 노트

 

(서로 욕하는 연습을 한 후)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욕을 하도록 행동하고는, 우리가 정말 끄덕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옛날에 듣던 말들이 생각났다.

엄마는 우리에게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적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런 말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은 우리가 간직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것이기 대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습을 다른 연습으로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난 너희를 사랑해... 난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 난 너희만 사랑할 거야. 영원히... 너희는 내 인생의 전부야..."

반복하다보니, 이런 말들도 차츰 그 의미를 잃고 그 말들이 주던 고통도 줄어들었다. 

 

(작문 연습)

- 각자 주제를 정한 후 작문을 하고 서로의 글을 바꿔서 본다. 사전을 찾아가며 틀린 철자법을 고치고, 끄트머리에 '잘했음' 또는 '잘못했음' 따위의 평가를 써준다. '잘못했음'을 받은 작문은 불 속에 던져버리고, 다음번 작문시간에 같은 주제를 다시 다루게 된다. '잘했음'일 경우, 우리는 그 작문 내용을 커다란 작문 노트에 다시 옮겨 적는다.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저거야 한다. 

(예시.)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걸 연습하다가 한 부인을 만나서)

"구걸하는 게 부끄럽지 않니? 우리 집으로 가자. (일을 하렴)"

"우리는 부인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아요, 부인. 우리는 부인의 수프와 빵을 먹고 싶지 않아요. 배고프지 않거든요."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왜 구걸을 하지?"

"구걸하는 기분이 어떤지, 그리고 사람들 반응은 어떤지 관찰하기 위해서예요."

그녀는 소리 지르며 가버렸다.

"더러운 자식들 같으니라고! 건방지게!"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사과와 과자, 초콜릿, 동전 등을 길가 풀숲에 던져버렸다.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은 버릴 도리가 없었다.

 

한 남자가 말했다.

"당신, 입 닥쳐. 여자들은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 여자가 말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보 같은 소리! 온갖 걱정에 빠져 지내는 게 여자야. 아이들 먹여 살려아지. 부상병들 돌봐야지. 당신들은 일단 전쟁만 끝나면, 모두 다 영웅이 되잖아. 죽었으면 죽어서 영웅, 살아남았으면 살아서 영웅, 부상당했으면 부상당해서 영웅. 전쟁을 발명한 것도 당신들 남자들이고, 이번 전쟁도 당신들의 전쟁이야. 당신들이 원해서 그렇게 한 거야, 개똥같은 영웅들아!"

우리 옆에 있던 노인이 말했다. 

"아무도 이런 전쟁을 원하지 않았어. 아무도, 아무도." 

 

2부. 타인의 증거 

 

(아그네스) 그녀는 그네를 타며 깔깔 거렸다. 

루카스가 물었다.

"넌 슬퍼해야 할 일이 없겠구나?"

"네, 그래요. 저는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로 마음을 달래거든요." 

 

(불면증 환자와 대화하는 루카스)

"수용소 건물 문 뒤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네. 인간의 시체를 태우기 위해 인간이 피워놓은 불이었다네.

루카스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도 알아요. 저도 그와 비슷한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요, 바로 이 도시에서."

"자네는 아직 어렸을 텐데."

"저는 물론 아이였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나는 사람들이 어떤 새나 꽃을 기억하듯이, 내 아내를 기억하고 있지. 그녀는 인생의 기적이었어. 그녀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게 가볍고, 쉽고, 아름다웠지. 처음에는 내가 그녀 때문에 이곳에 오곤 했는데, 이제는 주디트, 살아 있는 여인 때문에 이곳에 오네. 자네가 보기엔 우습겠지, 루카스, 하지만 난 주디트를 사랑해. 자기 자식도 아니면서 아이들에게 쏟는 그녀의 사랑, 은혜, 힘을 사랑하네."

루카스가 말했다. 

"하나도 우습지 않아요."

"내 나이를 생각해도 말인가?"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본질만이 중요해요.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많은 여자들이 실종되거나 죽은 남편을 기다리며 울고 있어요. 하지만 노인께서 방금 말했듯이,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있지요.'"

불면증 환자는 눈을 뜨고 루카스를 바라본다.

"희미해지고, 줄어들고,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네." 

 

루카스는 계속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뉴스 대신에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날까지. 

 

 

(빅토르의 죽음 후)

"그는 두려워했나요?"

"두려워하더냐고? 내가 보이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어. 처음에 그는 믿지 않았어. 믿을 수가 없었떠 거지. 그가 사면이나 기적을 기대했는지 어쨌는지, 그건 잘 모르겠네. 그가 그의 유언장을 작성하고 서명하던 날, 그는 확실히 더 이상 환상은 가지지 않는 것 같더군. 마지막 날 저녁에 그가 내게 말했네. '내가 죽을 거라는 건 알겠는데, 페테르, 이해는 못 하겠어.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 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신, 그는 분명히 아닐 거고. 그는 우리의 육신을필요로 하지 않아. 그러면 사회가 원하는 건가? 사회는, 나를 살려두면, 아무에게도 소용없는 시체 한 구 대신에 한 권이나 여러 권의 책을 얻게 될텐데."

 

3부. 50년간의 고독 

"제가 관심 있는 것은요, 당신이 쓰시는 글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인지 하는 점이에요."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대문에, 그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는 나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더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꿈속에서 루카스와 클로스의 대화) 

"생각에 깊이 빠지기 시작하면, 인생을 사랑할 수 없어." 

내 형제가 자기 지팡이로 내 턱을 들어올린다.

"생각하지 마, 저길 바라봐! 저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본 적이 있어?"

 

(클로스와 안토니아)

"제게 다 말해주세요. 다 알고 있는 편이 나아요. 저도 이제 진실을 알 만큼 충분히 컸어요.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인 걸요." 

 

나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적당한 단어를 아직 찾지 못했다. 드라마, 비극, 파국 따위로도 부를 수 있겠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단순히 '그 사건'으로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 걸맞은 이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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