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슈테판 츠바이크
- 출판
- 빛소굴
- 출판일
- 2023.04.25
작은 여름 콘서트가 열린 듯 창유리 틈새에 낀 모기들의 가느다란 바이올린 소리나 호박벌의 우울한 첼로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여자의 몸은 새들이 떠나간 숲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스물여덟 살의 여자는 행복이란 게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은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배운 적이 있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린, 한때 알았다는 사실만 기억나는 외국어 같았다.
피로가 이미 여자의 혈관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이따금 여기저기 관절이 얼어붙는 듯 아팠다.
조용히 몽상하고, 묵묵히 일하고, 창가에 꽃에 물이나 주면서 차분히 살아가리라고 다짐했다. 바라는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이. 여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새롭고 신나는 일도 찾지 않았다. 전쟁에 십 년의 젊음을 빼앗긴 스물 여섯 살의 여자는 행복을 누릴 용기도, 남은 힘도 없었다.
웅장한 대자연을 바라보며 여자는 마치 땅을 갈아엎는 쟁기처럼 인간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여행의 힘을 실감했다. 여행은 일상의 삶에 익숙해져 단단하게 굳어버린 영혼의 껍질을 단번에 벗겨버리고,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변신을 향한 욕망에 언젠가 열매가 열릴 씨앗을 심어놓는다.
부유함의 지옥에 들어와 앉아 있는 여자의 뺨에 모욕적인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와 끊임없이 부딪쳤다.
우아한 사람들 옆에서 얼마나 절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순간,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에 휩싸여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린 여자는 난생처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영혼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탄력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단 한 번의 체험만으로 무한히 커질 수 있고, 그 비좁은 공간에 온 세상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반 볼렌 양은 정말 젊은이다운 눈을 가졌군요. 그래서 모든 사물을 실제보다 젊게 보는 거예요. 당신이 옳은 것 같네요. 어쩌면 나는 아직 내 흰머리만큼은 늙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탈리아를 처음 가봤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무슨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고향 사람들 모두 너무 가난하다 보니 빈곤함에 지쳐 의심만 늘게 된 걸까? 아니면, 내가 갑자기 매력적인 여자로 변했나? 지금까지 밖으로 표출되지 못했던 매력이 이제야 나타났나? 내가 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예쁘고 똑똑한데 매력적인데 다만 그렇게 믿을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 아닐까?
여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면서 자신의 본래 모습 역시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저처럼 열정에 불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균형 감각을 잃었다. 28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했기에, 그리고 그 발견에 도취되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잊고 만 것이다.
정상에 선 사람은 세상을 제대로 내려다보지 못하고, 행복에 겨운 사람은 남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법이다. 실제로 고생해본 사람만이 어떤 일에나 방심하지 않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렇게, 직감적으로 위협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기고 남보다 더 영리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인간이나 국가에 대한 장군의 기대는 전쟁을 치르면서 이미 무너져 버렸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일 뿐 아니라, 타인에게 안겨준 고통에 무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신 앞에서는 넙죽 엎드리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짓밟아 버리는 간사한 인간들로 가득한 이 세상을, 이 여자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야. 혹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이해하겠지.
자신에 대해서만, 자신의 젊음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여자를 보며 장국은 완전히 용기를 잃었다.
나는 이제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아. 관심도 없어. 나는 볼셰비키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아. 나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도 아냐. 나는 아무래도 좋아, 나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어. 내가 봉사하고 싶은 단 하나의 정부는 바로 나 자신이야. 다음 세대가 행복해지든 말든지, 공산주의 국가가 되든지 파시스트 국가가 되든지 아무 관심 없어. 내 관심은 오로지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는 것뿐이야. 그리고 갈기갈기 찢긴 내 인생을 언젠가는 다시 주워 모아서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성취하고 싶어. 언젠가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면서 자유롭게 숨쉴 여유가 생긴다면, 그리고 내 인생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는다면, 그때는 한 번쯤 저녁 식사 후에 세상의 질서를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문제를 한가하게 생각해 볼 거야. 하지만 당장은 내 처지만 생각해야겠어. 너희는 다른 일들에 관심을 보일 여유가 있겠지만, 나는 나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거든. - 프란츠
우리는 너무 착하고, 의심할 줄도 몰랐어. 그래서 이용만 당했지. 하지만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앞으로 절대 안 속을 거야. 숨 쉴 수 있고 먹을거리 있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이야기, 그 정도면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신도, 국가도, 삶의 의미라는 것도 믿지 않아. 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런 권리를 찾지 못하는 한, 세상이 내 인생을 빼앗아 갔고 나를 속였다고 생각할 거야. 언젠가 진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내다 버리거나 토해낸 찌꺼기를 먹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낄 때까지 나는 계속 그렇게 할 거야. 이해할 수 있겠어?
가난한 사람에게서는 냄새가 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싫습니다. 만족감에 빠진 인간들 말입니다. 그자들이 저를 자극하는 바람에 이따금 어쩔 수 없이 호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쥐곤 합니다.
저들은 일요일에는 가동을 중단하는 기계 같은 존재들입니다.
사람을 정말 미치게 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제거할 수 없는 어떤 요소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마치 운명처럼 만들어 놓은 어떤 조건 때문에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일 거예요.
그들 옆에는 어떤 알 수 없는 운명이 허무하게 방치하고 구겨버린 그들의 인생을 닮은 초라한 짐 꾸러미들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시끄러운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몸과 마음은 진실과 신뢰를 갈망하는데 낮은 목소리로 거짓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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