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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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내일을 향한 질문, 젊은 문학의 새로운 발견 「소설Q」. 젊은 작가들의 경장편을 중심으로 하는 시리즈로, 시대의 공기를 잘 반영한 첨단의 문학으로 동시대 독자들과 빠르게(Quick) 소통하며 재치 있는 이야기(Quip), 퀴어한(Queer) 문학, 논쟁적인(Quarrel) 작품 등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고자 한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은 신동엽문학상,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고, 섬세한 감수성과 거침없는 서사로 한국문학에서 주요한 자리를 획득한 최진영의 『이제야 언니에게』이다. 주인공 ‘이제야’의 일기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번 소설은 성폭력 피해자인 여성 ‘이제야’가 절망 앞에서도 끝내 무릎 꿇지 않으며 들려주는 목소리가 압도적인 울림을 가져다주는 작품이다. 《문학3》 온라인 지면을 통해 연재할 당시,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던 작품을 완전히 새롭게 탈고하였다. 비가 내리던 2008년 7월 14일, 제야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동생 제니와 사촌동생 승호와의 아지트인 버려진 컨테이너로 향한다. 제니와 승호가 오기를 기다리던 제야는 뜻밖에도 같은 동네에 살면서 늘 다정하고 친절하게 굴던 당숙을 맞닥뜨리고 당숙은 거기서 돌변하여 제야를 성폭행한다. 그날 이후 당숙이 자신이나 제니에게 또다시 같은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제야는 산부인과와 경찰서를 홀로 찾아가며 침착하게 대응하지만, 부모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전염병에 걸린 듯 취급하는 친구들의 냉소적인 행동으로 인해 결국 버려지듯이 멀리서 혼자 사는 이모와 함께 지내게 되는데……. 일기장을 보여주듯 인물의 세밀한 내면을 독자와 공유하고 나아가 제야의 이야기를 모두의 이야기로 확대함으로써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행하거나 방관하고 있는 일상의 폭력을 대면하게 하는 이 작품을 집필하면서 여성인 자신조차도 내면에 축적된 가해자의 언어와 행동방식이 얼마나 농후했는지 새삼 발견하고 깊은 반성과 슬픔으로 제야의 마음을 상상했다는 저자는 소설 곳곳에서 뭉근하지만 단호한 진심을 깊이 있는 문장으로 전달한다.
저자
최진영
출판
창비
출판일
2019.09.23

 

 

 

2008년 7월 14일

끔찍한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

 

2008년 7월 28일 

일기장을 태운 날도 일기를 썼다.

어차피 태울 거 뭐 하러 써? 제니가 물었다.

어차피 죽을 거 뭐 하러 사니. 제야가 대답했다.

제야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를 묻는 시간, 가만히 앉아서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일어난 일을 나열하다보면 불분명하던 감정도 한군데로 고여 어떤 단어가 되었다. 엉켜 있던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닿기도 했다. 

 

평소 일기를 쓸 때 제야는 단어의 한계를 답답해했다. 단어들은 너무 납작하고 단순해서 진짜 감정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바람이나 햇살, 풍경과 냄새를 표현할 때도 궁핍했다. 입체를 평면에 구겨 넣는 것만 같았다. 

지금 제야는 단어의 한계에 안도한다. 자꾸자꾸 커지는 그날의 기억을 얄팍하고 단순한 단어에 가둘 수 있을 테니까.

 

2008년 7월 13일

나는 하고 싶은 게 있지만 명확하지 않고 느슨하다. 외교관처럼 딱 떨어지는 게 없다. 모르겠다. 그냥 지금이 좋다. 하루하루를 꼭꼭 눌러서 살 수 있는만큼 다 살아내고 싶다. 

 

2004년 5월 5일 

어른들은 제야를 보고 맏이라서 의젓하다고 했다. 제니에게는 막내라서 철이 없다고 했다. 제야는 그런 식의 구분이 싫었다. 그런 말로 자기를 '싫어요'라는 단어에서 멀리 떨어트려놓는 것만 같았다. 

 

2008년 7월 14일 

일어난 일은 종이가 아니니 찢어도 태워도 없어지지 않고 없던 일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없애버리고 싶다. 없던 일로 만들고 싶은 건 엄마도 아빠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쓰고 있따. 내게 모든 걸 떠밀고 나를 없애버리고 있다. 지금의 나를 쓰레기로 만들어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다 나를 위해서라고. 내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찢어버리고 싶은 건 내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찢어지고 있다. 

 

2007년 4월 22일 

우리에겐 각자의 그늘이 있지. 나는 그 그늘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때로는 그늘이 그 사람을 고유하게 만드는 것도 같다. 어른들은 눈치 못 챘겠지만 나도 종종 그렇다. 욕하고 싶고 울고 싶고 죽고 싶고 내가 너무 초라하고 막막하고 불행한데 이상한 것에 웃음을 멈출 수 없고 아무나 보고 두근러긴다. 아니, 아무나는 아니다.

가끔 이번 인생을 한번 살아본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어떤 구슬에 갇혀 있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어른인 내가 있어서 지금의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을 때도 있다. 그 기분은 진짜다. 

 

2008년 7월 14일

찢을 수 없다. 찢으면 안 된다. 찢어버리면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은 중요하다. 아름다운 과거보다 중요하다. 더 나은 미래보다 중요하다. 지금 나는 살아있다. 그러니 다음이 있다. 내게도 다음이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이 서너 개쯤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겠느냐고 말하면서, 이번 생은 이대로, 이대로 재수 없게, 미친 사람들, 그런 일이 어떻게 운이고 재수인가. 그에게만 생이 한번뿐인 듯 실수 하나로 인생을 망칠 수 없다고... 그 사람은 이미 망가진 사람이다. 스스로 망가져서 나까지 망친 사람이다. 

내 입장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다. 내 입장이 되고 싶지 않은 거겠지. 나와 같은 일이 자기들은 겪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사람들은 내가 겪은 일이 먼지인 줄 안다. 먼지처럼 털어내라고 말한다. 먼지가 아니다. 압사시키는 태산이다. 꼼짝할 수 없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움직일 수 있다. 걷고 보고 말하고 달릴 수 있따. 울고 웃고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쓸 수 있다. 나는 하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2008년 11월 1일 

이모 : 나랑 같이 있는 동안 너는 잘 먹을 거야. 대충 먹고 때우고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너를 대접할 거야. 네게 도움이 될 거야.

이모는 내가 겪은 일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잘해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아끼는 거야.

너무 노력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노력은 힘든 거잖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지. 

 

2009년, 2010년

제야는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 셀 수 없이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살 수 있는 만큼 다 살아내고 싶은 마음 같은 것. 제야는 살아내고 싶었다. 

 

2012년, 2013년

종일 몸을 썼다. 일이 끝나면 거리를 헤맸다. 술을 마셨다. 처음 만난 사람과 모텔에 갔다. 하루하루를 없애버렸다. 함부로 말했다. 두려워서 두려움 속에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만 같아서 먼저 일을 저질렀다. 가까운 불행으로 먼 불행을 가렸다. 샘솟는 자기비하를 견딜 수 없어 타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타인이 제야를 함부로 대할수록 제야도 자기를 함부로 대할 수 있었다. 제야는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모든 것을 '그깟 것'으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잠깐의 일에 너무 오래 얽매여 있다고, 내가 내 인생을 유기한다고 생각하겠지. 마음만 먹으면 털어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나를 나약하다고 생각하겠지. 여자애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이게 과연 타인의 생각인가? 내 생각 아닌가? 내가 나를 멸시하는 거 아닌가? 멍청한 자기혐오 따위 그만두고 싶다. 계속 떨어질 수는 없다. 나는 달리고 싶다. 

 

어째서 나는 나를 저주하나. 나를 버리지 못해 안달인가. 어째서 나조차 내게 책임을 묻는가. 나를 걱정했던 그와 나를 강간한 그는 한 사람이다. 친절하고 비열할 수 있다. 다정하고 잔인할 수 있다. 진실하고 천박할 수 있다. 그게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괴물이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너무 쉬운 그 말은 아무 의미 없다. 너무 쉬워서, 아무 힘이 없다. 그는 괴물도 짐승도 악마도 아닌 사람이어서 나를 강간했다. 그는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기만하는 편이 훨씬 쉬우니까. 그는 쉬운 인생을 살 것이다. 나는 여태 애썼다. 다시 애쓸 것이다. 나는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제니에게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옆에 없는 시선이 섞여.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에도 그런 시선이 끼어들어서 감정을 방해해. 나를 협소하게 만들고 내 주관을 죽이고, 나를 늘 관철당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그건 어떤 시선이냐면, 그런 일을 겪은 너는 행복할 수 없다는 시선. 너에게 잘못이 있다는 시선. 너는 영영 외롭게 혼자일 거라는 시선, 네 불행은 네 탓이라는 시선. 그 일이 일어나고 내가 배운 시선들이지. 배우고 흡수해서 내 것으로 만든 시선들. 나에게 나는 피해자이고 가해자고 때로는 무참한 방관자야. 

 

그러니까 제니야, 이게 다 무슨 일이냐면, 나는 살고 싶다는 말이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던 나로, 온전한 나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편에 서서, 제대로 살고 싶단 말이야. 

 

2017년 12월 31일

제야는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신을 궁금해했다. 자기 삶이 한편의 소설이 되는 상상도 했다.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야는 지금 소설을 읽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은 올 것이다. 

 

 

 

/ 발문 중 

 

당신도 나쁜 사람 아니냐고, 그런 짓을 할 사람 아니냐고 묻는 의심의 진심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알고 보면 다 착한 사람들이라고 가르치면서, 같은 일은 두번 겪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달랜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쉽사리 의심이 걷히고 불행의 올가미에서 풀려날 어둠이 아니다. 제야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나와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많을 거라는 직감과 앞으로도 많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의심의 진심에는 우리 모두의 안부와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다. 미래의 자신을 두려워하면서 우리를 걱정하는 사람. '나'라는 단어 안에 '우리'를 집어넣는 사람을 두고 불행을 자처했다고 말하면 당신은 나쁘다.

 

나라는 단어에 우리를 집어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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