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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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함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의 이 자그마한 도시에서 기후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모든 것이 다 함께, 열광적이면서도 무심하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는 사람들이 권태에 절어 있으며 여러 가지 습관을 붙여 보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민들은 일은 많이 하지만, 그건 한결같이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에서 하는 일이다. 

 

마치 그 광경은 우리의 집들이 자리 잡고 서 있는 땅 자체가 그 속에 고여있던 고름을 짜내고 지금까지 안으로 곪고 있던 응어리와 악혈을 표면으로 내뿜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생각만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페스트'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온 것도 사실이고, 바로 이 순간에도 재앙이 희생자 두서넛을 후려쳐서 쓰러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거야 뭐 중지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해, 드디어 쓸데없는 울둠의 그림자를 쫓아 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페스트가 멎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머릿속에서의 상상, 머릿속에서의 그릇된 상상이 아니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스트가 멎는다면 - 그것은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우리는 페스트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우선은 그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하고 다음으로는 그것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 있는지 어떤지를 알게 될 것이다.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와 동작에 얽매여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멎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일이었다. 

 

여러 주일 동안, 우리들은 같은 편지를 끊임없이 다시 쓰고, 똑같은 호소의 말을 다시 베껴 쓸 수밖에 없게끔 되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우리의 마음에서 솟아 나와 피가 뜨겁도록 흐르던 말들이 의미를 잃어버린 채 텅 빈 것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들은 기계적으로 그것들을 베끼고, 그 뜻이 죽어 버린 말들로 우리의 고달픈 삶의 신호를 나타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아무 반향도 없는데 기를 쓰고 내뱉는 독백이나, 벽에다 대고 주고받는 그 무정한 대화보다는, 전보문의 판에 박힌 듯한 호소가 차라리 낫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고 뚜렷한 앞날도 보이지 않는 그 급작스러운 이별에 우리들은 망연자실한채 아직 그토록 가까우면서도 어느새 그토록 멀어져 버린, 그리고 지금은 우리들 하루하루의 삶을 가득히 차지하고 있는 그 존재의 추억을 뿌리칠 능력도 없어진 형편이었다. 

 

그럴 때에 그들의 용기, 의지 그리고 인내는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붕괴해서 그들은 영원히 그 수렁에서 다시 기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해방될 날의 기한을 결코 생각지 않고 이제는 더 이상 미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항상, 말하자면 두 눈을 내리깔고 지내도록 무척 애쓰고 있었다.

 

사실 시민들이 냉정을 잃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자기들이 기다리는 사람에게로만 쏠려 있었다. 전반적인 낙담 속에서 사랑의 이기주의가 그들에게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또 페스트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지 페스트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이별이 끝도 없이 계속될까 봐 염려된다는 점에 한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들은 전염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서도, 자칫 냉정 함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로 건전한 여유 같은 것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절망감은 그들을 공포로부터 건져 주었고, 그들의 불행에는 좋은 점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 중 누가 병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대개의 경우 본인은 그것을 깨달을 시간적 여유도 없이 그리된 것이었다. 눈앞에 있지도 않은 그림자 같은 존재를 상대로 계속해 온 기나긴 마음속 대화로부터 끌려 나오는 즉시 그는 다짜고짜로 가장 무거운 침묵만이 전부인 흙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이었다. 그는 앞뒤 돌아볼 시간의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공적인 일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공공복지도 개개인의 행복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2부

 

그리고 언제나 비슷한 모습으로 계속되기만 하는 저녁들을 오래 겪고 나자, 리유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비슷한 광경의 기나긴 연속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리유는 이제 더 이상 동정심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동정이 아무 소용이 없다면 동정하는 것도 피곤해지는 법이다. 

 

<추상과의 싸움을 기록하는 태도> 

추상과 싸우기 위해서는 추상을 약간은 닮을 필요가 있다. / 랑베르가 볼 때 추상이란 자기의 행복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었다. / 그러나 리유는 추상이라는 것이 행복보다 더 힘센 것으로 나타날 수 있으므로 그런 경우, 반드시 그런 경우에만, 추상을 고려해야 된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었떤 것이다. 그리하여 리유는 꾸준히, 그리고 새로운 각도에서 개개인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그런 종류의 우울한 투쟁을, 그 기나긴 기간 동안에 걸쳐 우리 도시의 삶 전체를 지배했던 그 투쟁을 계속 추적할 수가 있었다. 

 

<신부의 설교 중>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재앙이 도리어 여러분을 향상하고,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질병이 확대되면 도덕도 역시 헐렁해질 것이다. 

 

<"하느님은 위대하시다, 그에게로 오라"하고 되풀이해 외친 한 노인>

모든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무엇, 아마도 신보다 더 긴요하게 여겨지는 그 무엇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초기에 그들이 이번 질병도 딴 질병이나 다름없는 흔한 것이리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종교도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향락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낮에 사람들 얼굴에 그려진 그 모든 고뇌는 뜨겁고 먼지투성인 황혼 녘이 되면 일종의 흉표한 흥분이나 모든 시민을 열에 들뜨게 하는 서투른 자유로 낙착되고 만다. 

 

(관리)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상상력입니다. 그들에겐 결코 이 재앙의 규모에 맞설 만한 능력이 없어요. / 만약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가는 그들은 결국 손들도 말거예요. 우리도 함께 죽겠죠. 

 

선생님은 신을 믿으시나요? /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의사는 만약 어떤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신부) 파늘루까지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이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서지요? /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윤리관 때문인가 봐요. / 어떤 윤리관이죠? /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라디오 - 연대책임이 있다며 통감하는 도시 밖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람은 자기 눈으로 볼 수 없으면 어떤 고통을 참으로 나눌 수 없다는 저 가공할 물겨감을 그 음성들은 동시에 증명해보이는 것이었다. 

 

<진단서를 써주지 않는 의사 리유를 비난하는 랑베르>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선 신물이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은 살인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리유는 부드럽게 말했다.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 아닙니다."

 

3부

'항상 나보다 더 부자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요약하는 표현이었다. 

 

외관적으로는 포위된 상태 속에서의 연대책임을 시민들에게 강요하던 질병은 동시에 전통적인 결합 혀ㅕㅇ태를 파괴하고 개개인을 저마다의 고독 속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혼란을 초래했다. 

 

서술자는 여기서 예컨대 옛날이야기에서 나오는 그것처럼 용기를 북돋아 주는 영웅이라든가 빛나는 행동과 같은, 아주 굉장한 구경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소개할 수 없으니 얼마나 유감스러운지 모르겠다. 그 까닭은 재앙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구경거리는 없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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