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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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글항아리에서 『사나운 애착』을 시작으로 비비언 고닉 선집을 선보인다. 이번에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비비언 고닉은 버지니아 울프에 비견되는 문학비평, 특히 회고록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될 만큼 자전적 글쓰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 작가다. 1987년 처음 발표된 『사나운 애착』은 여성, 유대인, 도시하층민으로 뉴욕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정신의 삶’을 깊은 통찰에서 나온 신랄한 문체로 기억하고 풀어낸다. 작가의 자아 형성에 강렬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 그들과의 관계에서 벌이는 기나긴 자기투쟁, 특히 교육받지 못한 채 가정과 가부장제에 헌신하느라 자기 삶이란 것을 살아보지 못한, 그러나 그 사실을 때로는 어렴풋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직감하는 현명하고 강인한 어머니와의 끈질기고 지독한 관계를 적실히 써 내려간다. 중년의 작가는 노년의 어머니와 뉴욕 거리를 거닐며 담소하고 회상하고 언쟁한다. 싸우고 침묵하고 기대하고 지긋지긋해하고 환희와 생동으로 역동하다가도 무섭게 굳어버리는 이 사나운 애착 속에서 두 사람의 인생은 다른 무엇도 아닌 진실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 문장까지 타협도 미화도 없이 펼쳐놓은 생은 대담하고 적나라한 만큼 서늘하고 강렬하다. 자전적 글쓰기의 전범이자 고전이 된 『사나운 애착』은 작가의 대표작인 동시에 록산 게이,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 오늘날 수많은 스타 작가를 탄생시킨 회고록Memoir 분야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이 장르의 부흥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작가에게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고닉의 『사나운 애착』은 『뉴욕타임스』에서 지난 50년간 최고의 회고록으로, 『옵서버』에서 20세기 100대 논픽션으로 선정됐다.
저자
비비언 고닉
출판
글항아리
출판일
2021.12.22

 

산책을 하며 서로에게 다시금 애정을 느끼기는커녕 서로 할퀴고 물어뜯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도시 어딘가를 항상 같이 걷고 있다. 

 

엄마는 엄마만의 부류에 속했다. 사회적 자아라는 외피와 남들이 모르는 자기 자신이라는 본질 사이에 넉넉한 공간이 있었던 엄마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표현했다. 

 

엄마는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고 같은 사건이라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듯했다. 엄마는 주변 이웃들과 비교하면 당신이 한층 '개화된' - 생각과 감정이 더 성숙한 - 사람이라고 확신했으니 깊이 생각하고 자시고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개화됐다'는 엄마가 가장 애용하는 단어였다. 

 

엄마는 여기 아닌 다른 세상, 진짜 세상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가끔은 당신이 그 세상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열렬하고 절실하게. 엄마는 집안일에 열중하다가도 갑자기 모든 동작을 일제히 멈추고,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몇 분 동안 싱크대를, 바닥을 ,스토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세상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데? 그게 대체 뭔데?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사전에 있는 '사랑'은) 가장 높은 차원에 있는, 영혼의 고귀한 본질, 윤리적 사명 자체였다. 존재하면 오해할 수 없고 부재할 때도 오해할 수 없는 확실한 감정이다. /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겠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승리의 미소와 비난조를 장착한 엄마는 말한다. "요즘 사람들은 불행이 너무 생생해." / 엄마는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당신만 그 사실을 모른다. 단 한 번도 알았던 적이 없다.

 

 우린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자기만의 세상에서 고립된 채 살아온 사람들, 평생 서로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해 닮아버린 두 여자다. 이런 순간에 우리가 모녀ㅕ라는 게 마치 외계인이 전달한 메모처럼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엄마와 딸이 맞고,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혈연이니 효도니 하는 단어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 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 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지." 엄마는 나직하게 말한다. 

 

이건 살면서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구나. 저들은 그 안에 풍덩 빠져드는구나! 아줌마들의 대화는 사랑스러웠다. 이 안에서라면 양분을 얻고 보호를 받고 기뻐하고 안심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확실히 기억하는 건 무엇보다 그제야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는 점이다. 

 

내가 속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여러 가지 확실한 문제가 있다. 숨이 막힌다. 그래도 안전하다.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 조직의 막처럼 내 콧구멍에, 내 눈커풀에,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다. 숨을 쉴 때마다 엄마를 내 안에 들였다. 나는 엄마라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취했고 풍요로우면서도 밀실처럼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엄마의 존재감, 엄마라는 실체,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받는 여성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쁜 문장 1. (어린이 시절 자전거를 타던 때) 평소보다 더 세고 거칠게 페달을 밟는다. 달콤하면서도 겁도 조금 난다ㅏ. 깜짝 놀란 몸의 감각들이 일순간에 폭발할 것 같다. 

이쁜 문장2.  나는 몽롱하고 피곤한 상태로 거실 소파에 앉아서 그날 남은 마지막 자연광을 이용해 책을 읽으려던 참이었다. 

 

오늘은 창창한 날, 예감이 좋은 날이다. 무엇을 보건, 내 눈에 무엇을 보고 내 귀가 무엇을 듣건 간에 내 안의 공간이 넓게 열리며 빛이 가득 들어온다. 나는 생각하고 싶다. 아니, 그러니까 오늘은 정말로 생각을 하고 싶다. 그 욕망이 '몰입'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드러낸다. / 엄마를 만나러 간다. 거의 날아갈 듯 몸과 마음이 가볍다. 나는 날고 있다! 엄마에게도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이 긍정의 기운을 나눠 주고 싶다. 불타오르는 생의 환희, 살아 있음에서 오는 행복감을 심어주고 싶다. 그래도 엄마는 내 가장 오래된 친구가 아닌가. 이 순간,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 엄마까지 사랑할 수 있다. "엄마! 오늘 날씨 정말 끝내주네." 내가 말한다. "엄마한테 솔직히 말해봐라." 엄마가 말한다. "너 이번 달 월세 있니?" "엄마, 있잖아..." "너 <타임>에 서평 쓴다고 했지? 그거 돈은 되니?" "엄마 그만해. 나 오늘 기분이 어떻냐면 말이야." 내가 말한다. "옷이 그게 뭐니? 왜 그렇게 얇게 입고 돌아다녀. 겨울 다 됐는데." 엄마는 언성을 높인다. / 내 안의 공간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벽이 무너진다. 숨쉬기가 곤란해진다. 천천히 침을 꼴깍거리며 중얼거린다. 엄마한테 말한다. "엄마는 참 딱 적당할 때 적당한 말을 할 줄 안다니까. 놀라워. 그것도 재능이야. 숨통을 콱 막히게 해." 하지만 엄마는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지금 비꼬고 있는 줄도 모른다. 지금 나를 나자빠지게 했다는 것도 전혀 모른다. 내가 엄마의 불안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엄마의 우울함에 완패해 버렸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어떻게 알겠는가? 엄마는 내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데. 엄마한테 말할까. 그건 죽음과도 같다고. 내가 여기 있는 걸 엄마가 모른다는 게, 절망과 혼란만이 가득한 눈으로 그저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서른일곱 살 먹은 이 여자아일 못 본다는 게 슬퍼서 죽고 싶어 진다고 말을 할까? 엄마는 또다시 언성을 높이겠지. "넌 날 이해 못 해. 여지껏 한 번도 이해한 적이 없어!"             

 

엄마의 거부는 강력하다. 나를 마취시키고 외경심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나마저 포기와 굴복으로 끌어들인다. / 엄마는 당신이 이 생에서 얻고 싶은 것, 당신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 것을 얻지 못했고, 그렇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의무로 여기며 불행이라는 먹구름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시커먼 구름 밑에서 무력하게, 툭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동정과 연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으로 남아 있기로 한다. 누군가 엄마의 그 지독한 우울함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겐 폭력이 된다고 하자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의 입과 눈은 상처와 분노로 번들거렸다.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내 기분이 이런 걸 어쩌란 말이니. 나는 내 기분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내심 당신의 우울한 상태를 예민한 감성, 강렬한 정서, 숭고한 영혼의 표시라고 여긴다. 당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에겐 최소한의 상호 관계가 필요하며 그 최저 수준 밑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생격하기만 할 뿐이다. 엄마는 당신의 악착스러운 불행이 어떤 면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하이고 판단이라는 사실을 읽지 못한다. 마치 한탄하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 너로는 부족해. 너는 나에게 평안과 기쁨을 줄 수 없고 이 상태를 개선해 줄 수도 없어. 그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긴 해. 그러니까 너에게 주어진 의무는 이해를 해야지. 내 이 모든 절망과 박탈감을 치료해 주기에 너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매일 깨닫고 사는 게 네 운명이야." / 엄마의 완경한 의지 앞에서 나는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여기서 반전이 있다면 엄마는 의지를 품을 수 없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반면 나는 모든 것을 원한다. 무엇이 됐던 원한다. 

 

이쁜 문장 3. "이번 주도 생산적으로, 건설적으로, 창의적으로 잘 보내셔." / "너도 욕심, 폭력, 질시, 질투 없는 일주일 보내." (너무 좋네) 

 

일어나서 일기를 썼다. "사랑이란 수동적인 감정이 이끄는 기능이며 만족스러운 확신보다는 이상에 의지한다. 사랑이란 우리가 태어났을 때의 원초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반면 일이란 적극적이고 표현적인 삶의 기능이며 아무런 결과를 내지 않는다 해도 행동하는 자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은 여전히 남는다. 상상했던 삶에 대한 접근을 부정당할 때 사람은 더 크고 깊게 사랑을 추구할 수 있다. 

 

(저자의 남자친구가 저자의 친구에게 데이트 신청한 것을 친구로부터 듣고 나서 싸움. 그런데 이 남자, 그들의 우정을 비하함.) 

나는 그딴 정의 거부할게. / 완강히 거부할게. 오로지 사랑만이 로맨틱한 애착이라면, 그 사랑 망하라고 해.

당신 참 어리다. 이게 사랑이야. 달리 사랑을 가질 방법은 없아.

그럼 난 사랑 없이 살아야지. 이딴 식으론 못 사니까. 

 

얼마 후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상 밖으로 나가 거리를 활보하진 못했다. 사실 단단한 땅과는 아주 먼 곳에, 난파된 배의 파편을 붙들고 바다에 둥둥 떠 있었다. 하지만 책상에는 앉았다. 매일매일 해야 할 일들에 매달렸다. 썩 잘해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책상이 - 사랑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은 아닐지언정 - 잠재적 구원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듯해 그 고통을 감히 느낄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렇네." 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 엄마의 부드러운 얼굴이 결심이라도 선 듯 확고하고 단단해진다. 나를 보더니 강철 같은 목소리로, 이디시어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깐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오래전 엄마의 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기억하는구나! / 나는 엄마의 인생 저장소야. 알잖아. 

 

(커피 물양으로 싸우다가) "그래 맘대로 하든지."  나 하는 짓이 어찌나 마음에 안 드는지 목소리까지 떨린다. 엄마의 오만, 엄마의 경멸, 엄마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기질. 절대적으로 엄마 곁에 머물러 있을 것들. 언어의 상징이요 존재의 숙어로 이것들이야말로 엄마의 자아를 완성한다고 믿는다. 타인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건 불쾌한 일에서 헤어나는 엄마만의 방식, 당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방법, 옳고 그름을 아는 법, 당신의 주장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 순간 엄마의 삶이 이해되면서 묵직한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만 골몰하는 대신 더도 덜도 말고 딱 1분이라도 그저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을 정도로 그 긴긴 세월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우리 두 사람 다 감격하는 듯하다. 

 

엄마와 나는 더 이상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있지 않는다. 드디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영구적으로 성취되었다. 나는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흡족하게 엿본다. 약간의 공간이 나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일용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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