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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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 좋아서 다 읽은 후에도 계속 곱씹다가 리뷰까지 놓친 책들이 혹시 있는가. 내겐 김연수 작가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 소설집이 그런 책이었다. 고뇌와 욕심으로 헛되게 보내는 나날들을 반성하며 스스로 빛나고 싶고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주인공이 산책할 때 매일 걷기 시작했고 잔상에 대한 문장을 읽고나서는 명상을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걸 더 사랑하도록 무한한 용기를 주는 책.

 

이 책에서 받은 희망과 위로로 더욱더 먼 미래까지 나아가길.

 


 

 

<풍화에 대하여>

사랑이란 제 쪽에서 타인을 바라볼 때의 감각이었다. 그것에는 절대적인 크기가 없었다. 멀어지던 그 순간부터 그녀의 살갗이 와 닿을 때의 촉감이나 자신을 쓰다듬던 손길은 전혀 되살아나지 않았다. 멀어지던 바로 그 순간부터 풍화는 시작되었다.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나와 같은 빛을 보니?> 

벨 에포크 Belle Époque / 아름다운 시절 

: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 전까지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으로 번성했던 시절을 회고적으로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고적으로'라는 말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이어지지 않았어도 전쟁 전에 유럽이 그토록 평화롭고 풍요롭게 기억될 수 있었을까? '회고적으로'라는 말은 그뒤에 일어난 끔찍한 일, 즉 전쟁을 겪고 난 뒤에야 그 시절이 제대로 보였다는 뜻이다. 벨 에포크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시절이 벨 에포크인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한 번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뒤에야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잘 살고 싶다면 이미 살아본 인생인 양 살아가면 된다.  

 

<거기 까만 부분에>

"친하지도 않았다면서 왜 그런 일까지 한 거죠?" / "뭐라도 하고 싶었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실제로 그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문 적이 있는 거잖아요. 그건 엄청난 관계성이에요. 어쩌면 그 아이들이 아니라 제가 죽을 수도 있었던 거잖아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었는데, 결국 그 아이들이 죽고 저는 살아 있는 세상만이 현실이 됐어요. 그래서 저는 이 현실에 책임감을 느껴요." / "책임감?"

"다르게 말하면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리고 그 사실을 제가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저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 영향을 받는 만큼 그 사건이나 죽은 아이들의 의미도 달라질테고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책임감이에요. 그 사건에 기꺼이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겠다는 것." 

 

오래 노출시킨 카메라의 사진에 훨씬 더 많은 별들이 있다. 기계적으로 더 섬세한 덕분에 카메라는 핸드폰보다 더 많은 별들을 사진에 담은 것이다. 말하자면 카메라 쪽이 더 많은 별들을 존재할 수 있게 한 셈이다.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별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라고 연구원은 말한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는 것, 그것이 관찰자로서의 책임감이 아닐까요."라고도 덧붙있다. 

 

"밤하늘을 관찰하는 태도를 학생들이 잊지 않도록, 어쩌면 책임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게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그 선생님은 그런 사진을 우리에게 찍어주신 게 아니었을까요?"라고 주희가 말했따. 그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이 세상이 온전히 내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

우리의 앞에는 상실의 깊은 강이 있었다. 강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강을 건너갈 방법은 없어 보였다. 

 

나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자주 들었는데, 어쩐지 그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의지할 만한 것은 독서뿐이었다. 그럴 때면 늘 그랬듯이. 

 

(월든 저자)소로는 삶의 근원적인 것만 접하기 위해 물질적인 소유를 줄여야 한다고 일기에 썼다. 나의 소유를 줄일수록 자연은 점점 늘어난다. 통나무집이 작아질수록 집 밖의 공간은 그만큼 불어나듯이. 무소유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을 다 가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 (월든 중) 나는 자연 속에서 온전히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이 온통 인간의 것으로 차 있다면 나는 기지개를 켜지 못했을 것이고 온갖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나에게 인간은 제약인 반면, 자연은 자유다. 인간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나, 자연은 나를 이 세상에서 만족하게 한다. 

 

느닷없이 떠오르는 나의 생각처럼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이건 누구의 생각일까? 세상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나는 걸어야만 한다. 

 

우리는 저절로 아름답다. 뭔가 쓰려고 펜을 들었다가 그대로 멈추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 채, 다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바라볼 때, 지금 이 순간은 완벽하다. 이게 우리에게 단 하나뿐인 세계라는 게 믿어지는가? 이것은 완벽한, 단 하나의 세계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우리 역시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생각의 쓸모는 점점 줄어들고, 심장의 박동은 낱낱이 느껴지고 오직 모를 뿐인데도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날 밤, 엄마를 만나러 가는 병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그 어떤 이야기도 답이 될 수 없는 곳에 지금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로는 종교란 대답하지 않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날 밤, 내게는 종교가 필요했다. 놀라고 감탄할 뿐, 어떤 대답도 주지 않을, 그런 종교가. 

 

나는 불행한가? 불운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책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중) 

'살아간다'는 건 우연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연이란 '나'가 있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누군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게 인간의 우연한 삶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우연한 일들을 내 인생으로 끌여들여 녹여낼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하고 안이하게 외부의 스토리에 내 인생을 내어주고 마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설사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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