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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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제 소망은 모두의 언어로 문학적인 글을 쓰는 것입니다.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사람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말과 동작에 똑같이 의미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니까, 정치적이라고 규정할 만한 선택이죠.

 

책은 아주 일찍부터 제 상상력의 영토, 제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와 세계에 대한 투영의 영토였습니다. 훗날 책에서 삶의 사용법을 발견했는데, 학교의 연설이나 부모의 연설보다 더 많이 신뢰했습니다. 제게 현실과 진실은 책 속에, 문학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났지요.

 

이제 곧 봄이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흥이 나겠지. 넌 아무 관심 없다고 하는데, 절망적이야, 그런 감정은. 난 기분이 널뛰고 있어. 생애 최고의 광적인 사랑에서 쓸쓸한 환멸로 곤두박질쳐. <편지 중>

 

감정이 기억을 박제하죠, 물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사물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강렬하게 느껴야만 한다>고 말한 사람이 스탕달이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사물들에 의해 마음이 건드려지고 흔들리는 것이 늘 편치만은 않습니다. 사는 게 고단해지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그러한 사물들이 기억 속에 박제되었다가 활용될 수 있으니까요.

 

이브토는 실제 세계를 가두는 경계를 의미했죠. 그런가 하면 나의 상상 세계, 그건 독서 덕분에 거대했어요. 수많은 작가가 자신들이 청소년기를 보낸 도시와 복잡한 관계를 맺죠. 스탕달은 그로노블을 생각하면 굴을 먹고 체한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이브토를 생각하면 뭔가 먹고 체한 느낌이 드는 건 아니지만, 그곳에 돌아가면 종종 마치 아주 묵직한 것에 붙잡히기라도 한 듯 모든 사고를 단박에 뺏겨 버렸다는 건 사실이죠. 아마도 이런 건 상상이 관장하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제가 확신하는 건, 사람들이 혹은 자신이 어딘가 지나간 적이 있다면 그 장소가 그 사람들 혹은 자신의 무언가를 간직한다는 겁니다. 혼자서 이브토에 돌아가면 - 누군가와 함께라면 달라지죠. 사물들이 덜 느끼져요-, 마치 실제로 제 존재의 여러 층이 남아 있는 장소로 다시 빠져드는 것 같죠., 유년기에 형성된 겹겹의 층들이 있고, 청소년기에 형성된 겹겹의 층들이 있어요. 사랑 이야기들, 꿈들도 있고요. 당신의 삶에서 처음 일어나는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들이 전부 다 있답니다. 나를 휩쓸고 가는 것, 흔히 말하듯 나를 <덮치는> 것이 바로 그렇게 시간이 켜켜이 쌓인 <양피지 텍스트>랍니다.

 

제가 잃어버린 시간을 추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전혀요. 저도 아마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더랬죠. 제가 글을 쓰면서 무엇을 추구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나아가, 제가 뭔가를 추구하기는 하는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어떤 책을 써야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그 책을 만드는 일이 아주 다급하고 중요해집니다. 책들을 쓰면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또렷하게 제기하기도 하죠. 그에 대한 대답은 종종 이렇더군요.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있으며, 사라지게 될 무언가를 구해 내기.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의 추구가 아니라 시간의 지나감을 감지하게 만드는 것이고, 시간이 어떻게 달아났는지, 우리 모두를 어떻게 데려가는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르그리트 코르니에의 발문 중>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아주 종종 자신의 일부를 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한 시기, 풍습, 일상의 만들과 행동들, 다소 오래전에 언뜻 품었던 생각들 혹은 보았던 이미지들, 감정들 그리고 어쩌면 열정들을. 그건 한마디로 자기 자신의 기억으로 되돌려지는 것으로, 그때 사람들은 그 기억을 더듬고 파헤치고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실제로 그러한 자전적 작품의 관건은 일종의 자기만족적 형식이 아니라 타자를 고려하는 경험, 역사의 사건들이나 일상의 사건들, 그리고 엇갈렸고 만났고 사랑했던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찾아다니다가 다시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이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 하나의 시대 - 작가와 마찬가지로 기억해 내고 그들 자신과 그들의 삶으로 되돌아가 보라는 초청을 받은 독자들에게는 보존된 세계이자 반사경의 세계 - 가 말들 속에 놓이고 텍스트의 두께 속에 아로새겨진다.

 

이브토는 가족의 행복, 꿈, 끝없는 독서의 장소이자 또한 비밀과 수모의 장소, 한마디로 인격의 구축과 작가의 소명이 일어나는 장소다. 따라서 이브토는 작가의 기억과 상상 속에 동시에 새겨진다. 왜냐하면 작가가 언급하는 도시는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고, 또한 언어로 표현되면서 문학적인 동시에 살아 있는 장소가, 사회적 환경과 시대의 전행이 된 개별적 운명들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이다.

 

 

 

✏️

아니 에르노가 자란 도시 '이브토'가 언급된 여러 전 작품 (수치 / 한 여자 / 남자의 자리 / 다른 딸)을 읽어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이브토에서의 강연/편지/사진/인터뷰) 내용을 수록한 책이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인 글들을 읽으며 '나의 삶'에 대해서도 조금씩 생각해본다. 나는 어떤 유년을 통과하여 지금의 어른이 된 걸까. 흐르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생각들은 내 행동과 기분에 어떤 영향을 펼치고 있는 걸까.  아니 에르노 책을 읽으면 무엇이든 쓰고 싶어진다.  보고 있는 드라마, 책 기록을 남기는 티스토리 블로그 외 '쓰기'를 위한 네이버 블로그를 다시 열었다. 일기든, 요리든 뭐든 기록하자는 생각. 오늘 도서관에 들려 안 읽은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을 둘러봐야겠다. 

 

 

안 읽은 책들은 하이라이트로 표시


34세 - 빈 옷장 발표 (1974)
37세 - 그들의 말 혹은 침묵 발표 (1977) 
41세 - 얼어붙은 여자 발표 (1981)
44세 - 자리 발표 (1983) → 르노도상 수상
48세 - 한 여자 발표 (1988)
51세 - 단순한 열정 발표 (1991)
53세 - 바깥일기 →85년부터 7년간 쓴 일기를 모은 작품 발표 (1933)
57세 -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부끄러움 발표 (1997)
60세 - 사건 / 외적인 삶  93년부터 99년까지 쓴 일기를 모은 작품 발표 (2000)
61세 - 탐닉 발표 (2001)
62세 - 집착 발표(2002)
63세 - 칼 같은 글쓰기 발표 (2003) · 아니 에르노 문학상 제정
68세 - 세월들 발표 (2008) → 마르그리트 뒤라스 상, 푸랑수아 모리아크 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 수상
71세 - 다른 딸 /

        - 검은 아틀리에 발표 (2011)
73세 - 이브토로 돌아가기 발표 (2013)
74세 - 빛을 바라봐, 내사랑 발표 (2014)
76세 - 소녀의 기억 발표 (2016)
80세 - 카사노바 출간 (2020)
82세 - 젊은 남자 출간 / 노벨문학상 수상 (2022) 

 

 

 

2023.04.12 - [읽고 보고 듣는 재미/책을 읽고서] - 아니 에르노 연보 (작품 목록) / 사진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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