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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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이 있다. 타인들의 현실에, 그들이 말하고 다리를 꼬고 담뱃불을 붙이는 방식에 사로잡히는. 그들은 덫에 걸리듯 타인들의 존재에 붙들린다. 어느 날, 아니 그보다는 어느 밤, 그들은 오직 단 한 명의 타자가 지닌 욕망과 의지에 사로잡힌다. 그들이 자신이라 믿어왔던 것들은 자취를 감춘다. 그들은 사라지고, 자신의 상像이 움직이고 복종하며 상황의 알 수 없는 흐름 속으로 휩쓸려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은 언제나 타자의 의지에 뒤처져 있다. 타자의 의지는 언제나 한 발 앞서 있다. 그들은 결코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다. 
이는 복종도 동의도 아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혹은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하고 간신히 생각하게 하는, 현실에 대한 당혹감일 뿐, 이마저도 이 사태 속에서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이미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지 않았을 때나 가능한, 여기에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상황과 몸짓, 앞으로 이어질 순간의 주인인 타자밖에 없다. 
그런 다음, 타자는 가버리고, 이제 당신은 그를 기쁘게 하지 못하며, 그는 당신에게 더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그는 당신을 더러워진 팬티 같은 현실 세계에 버려둔다. 이제 그가 신경 쓰는 건 그 자신의 시간뿐이다. 당신은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복종과 함께 홀로 남겨진다. 주인 없는 시간 속에 홀로.
그러고 나면 다른 이들은 쉽게 당신을 농락하고, 쉽게 당신이 놓여 있는 텅 빈 세계로 돌진한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고, 그들을 가까스로 느낄 뿐이다. 당신은 주인을 기다리고, 그가 당신을 한 번만이라도 만져주는 은총을 베풀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어느 밤, 당신에 대한 절대적 우월함을 내세우며 그는 당신이 당신의 전부로 간청한 그 일을 한다. 다음 날, 그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를 다시 되찾을 수 있으리란 희망이 살아갈, 옷을 입고 교양을 쌓고 시험에 합격할 이유가 된다.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고 당신은 그에게 걸맞은 사람이, 그 이상의 사람이 될 것이며, 과거의 불분명한 모습이 아닌 아름답고 지적이며 확신에 찬 당신의 달라진 모습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은 당신이 은밀히 선택한 주인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스스로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당신은 가차 없이 그에게서 멀어진다. 당신이 얼마나 정신이 나가 있었는지를 깨닫고 두 번 다시 그를 보고싶어하지 않는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잊겠다고, 그에 대해 결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녀는 일정한 '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흘러가는 여럿의 '나'를 가질 뿐이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올 날들의 자기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를 상상하거나 가늠할 수 없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배운 것이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는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자기와 닮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달라져버린 건 그녀다. 
 
바로 거기에, 나는 정말로 있다. 비탄을, 기대를, 혹은 마치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 내게 언어를 빼앗아가기라도 하는 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그때와 똑같이 느끼며.
그 방은 단어들로 샅샅이 묘사하는 것 말고는 존재하게 할 다른 방법이 내게는 없는, 저항하는 실재다. 
 
(르뒥의 글) 이런 것들을 읽으며 나는 감동을 받는다. / 절망을 느끼던 그 시기의 이 여성들이 자기처럼 버려진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위로하고, 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이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것이 지닌 고유성과 고독을 산산조각 내러 상상력이 찾아올 때 느끼는 이 회고적 위안의 기이한 달콤함.
 
철학이 우리를 합리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타인이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이상적이기 때문에 무의식과 숙명론은 우리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반복해 말하면서 계속 쓰고 또 쓰다 보니 연애해 보려는 마음이 싹 가셔 버렸어. / 나는 철학이 지닌 명료함에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여전히 개별적이고 성적인 하나의 사건이고, 그로 인해 느꼈던 수치심은 새로운 세기의 신념 속으로 녹아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이것은 글쓰기라는 안식처에 다다르기까지의 위태로운 횡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결국 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라는 깨달음을 증명하는 이야기. 이런 것은 모두 우리를 안심시켜 주는 믿음의 영역에 속한 일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깊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게 되었으니 그 진실을 밝혀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믿음. 
 
나는 문화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삶을, 시간을 붙잡고 이해하며 즐기는 것.' 이것이 이 이야기가 지닌 가장 커다란 진실일까?
 
나는 2년 전 내가 사랑을 향해 나아갔듯 내가 쓰려고 하는 책을 향해 나아간다.
 
내가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니체의 문장이 있어. '진실로 인해 죽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예술이 있다.' 
 
글쓰기의 가능성이 많아지는 건 우리가 경험하는 그 순간, 경험하는 것의 의미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것의 기억은 벌써 지워지고 있다 나는 이 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책을 쓰면서 뒤쫒고 있던 것마저도 녹아 없어져버렸다. 나는 종이 더미 속에서 이 글을 쓰려고 했던 의도처럼 보이는 메모를 발견해 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그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지닌 무시무시한 현실성과 몇 년이 흐른 후 그 벌어진 일이 띠게 될 기묘한 비현실성 사이의 심연을 탐색할 것. 
 
책. 아름다운 여름 - 체사레 파베세 / 모호한 대답 - 로저먼드 레이먼 / 사랑의 사냥 / 질식 - 비올레트 르뒥 
영화. 완다 / 불행한 경우 / 수우 / 가방 든 여자아이 / 애프터 루시아 
 

여자아이 기억
2022년 노벨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의 2016년 작품, 『여자아이 기억』이 소설가 백수린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자신의 삶을 이용해 보편적인 이야기로 만든다고 강조해온 작가의 작품 세계 속에서도 ‘기억 속 사건’으로만 남아 있던, 마지막 한 조각 퍼즐을 담았다. 1958년, 열여덟 살의 나이로 겪은 남성과의 첫 경험은 아니 에르노에게 오랜 세월 써야만 했고 쓸 수 없었던 미완의 프로젝트였다. 무려 60년 가까이 흐른 2016년, 20년 동안 수차례 펜을 꺾고 다시 쥔 끝에 출간된 『여자아이 기억』은 “이 책을 쓰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와 책임감으로 완성한 아니 에르노의 새로운 대표작이다. 인생의 한 시기에, 사랑을 알고 싶고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했던 여자아이에게 쏟아진 수치심과 모멸, 그리고 그날의 사건이 가져온 파장들. 대상이 되어버린 삶의 주체성을 다시 회복하기까지의 지난한 분투. 글쓰기를 통해 잔혹한 사건을 해체하고 그 본질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집요함과 대범함. 『여자아이 기억』을 읽으며 우리는 개인의 기억을 끊임없이 탐구해온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기억은 개인의 기억이자 책을 읽는 독자의 기억이 되며 우리의 상처를 환기한다. 한번쯤 1958년의 그 여자아이였던 우리는 책을 읽으며 과거의 그날을 들여다보고 그 시절 우리의 모습을 마침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지닌 무시무시한 현실성과 몇 년이 흐른 후 그 벌어진 일이 띠게 될 기묘한 비현실성 사이의 심연을 탐색할 것.’ (본문에서)
저자
아니 에르노
출판
레모
출판일
2022.11.30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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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ohmy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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