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헐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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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느낀 감정 한 가닥으로 책 한 권을 쓸 수 있는 아니 에르노의 실력은 늘 선망의 대상이다. 느꼈던 감정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행위가 날 구원으로 이끌지, 더욱 함몰시킬지 늘 궁금해하면서 '위험의 영역'으로 여기고 있다. (한심한 상황에서 느끼는 분노에 대해 써보고 싶긴 한데...) 확실한 건 아니 에르노는 읽는 자가 그 감정에 내내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것. [집착]에 즐겁게 매몰되어 독서했다.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 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성에 불과할지라도.
 
내 머리와 가슴과 자궁은 온통 그 여자로 채워졌고, 그녀는 가는 곳마다 나를 따라오며 내 감정을 좌우했다. 동시에 계속 따라붙는 그 존재로 인해 나는 강렬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녀로 인해,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내면의 움직임을 알게 되었고,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온갖 것들을 꾸며낼 힘과 에너지를 발휘하게 되었고, 열에 들떠 끊임없이 움직이게 되었다. 이중의 의미로, 난 사로잡힌 상태였다. 
 
한편에 고통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이 고통을 확인하고 분석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하지 못하는 사고력이 있었다. 
 
질투를 할 때 가장 이상야릇한 것은, 한 도시가, 온 세상이 결코 마주칠 리 없는 하나의 존재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의 기분을 되찾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드물게 맞는 유예의 순간에도, 불쑥 그 여자의 이미지가 뇌리를 스쳐가곤 했다. 그 이미지는 나의 두뇌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침입한 것만 같았다. 마치 그녀가 마음대로 내 머릿속을 들락거리는 것처럼. 
 
나는 감정과 감성이 물질적인 성질을 띤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되었고, 온몸으로 그것들의 밀도와 형태뿐만 아니라, 내 의식의 제재를 받지 않는 그들의 독립성과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느꼈다. 이러한 내면 상태에 견줄 만한 것들은 자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날뛰는 바다, 깎아지른 절벽의 붕괴, 심연, 해조류의 증식. 난 물과 불에 빗댄 비유와 은유의 필연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심지어 가장 닳고 닳은 표현조차도, 어느 날 그 누군가가 실제 겪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내 자리에 세워놓는 사람은 다른 여자가 아니라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을 나, 사랑에 빠져서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으며 아직 우리 사이의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나였다. 나는 그를 다시 소유하고 싶었다. 
 
이러한 탐색과 광적으로 여러 단서들을 짜맞추는 행위를 보며 지능의 탈선적 사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차라리 지능의 시적 기능, 문학과 종교 및 편집증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그 기능이라고 하고 싶다. 게다가 나는 그 시기에 가졌던 욕망, 감각, 행위들을 추적하여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내가 겪은 대로의 질투를 써나가고 있다. 내게는 그것만이 이 강박관념에 물질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여전히, 늘 본질적인 무언가를 놓칠까 봐 두렵다. 글쓰기는 결국, 실재에 대한 질투와 같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라고 그가 신기하 듯 말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기뻐하거나 정신의 교감을 믿게 되기는커녕 낙심만 할 뿐이었다. 그것은 내게 단 한 가지 의미로만 들렸다. 그 나머지 시간에는 내가 그의 생각 밖에 있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나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었을 말이었다. 내 경우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와 그 여자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나는 매일 보고 들은 것들로 엮어가는 내면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게 될 경우 그를 염두에 두고 준비하기 마련인 그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만들어내면서 살아왔다. 내 일상의 묘사는, 나는 곧 깨달았는데, 더이상 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 여자가 운전할 줄 모르고 면허시험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지적 탁월함의 징표ㅗ로, 실제적인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 보여주는 우월성의 표지로 느껴졌다. 나는 스무 살에 면허를 따서 다른 사람들처럼 스페인으로 일광욕하러 갈 수 있을 때 기뻐 날뛰었는데.
 
가장 커다란 행복처럼 가장 커다란 고통도 타자로부터 오는 것 같다. / 육체적이고 사회적인 다른 고통에 비해 내 고통이 비이상적이고 심지어 물의를 일으킨다고 여겨졌더라도, 내게는 그것이 하나의 사치로 여겨졌더라도, 그 고통이 생의 평온하고 유익했던 몇몇 순간보다 더 좋았다. 심지어 학업과 악착스러운 노동, 결혼, 출산의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에 갚아야 할 나의 몫을 다 지불하고 난 뒤, 드디어 청소년기 아래 시야에서 놓쳐버린 본질적인 것에 몰두하게 된 듯했다. 
 
처음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말들이 밤이 되면 다시 떠올라서, 갑자기 분명하고도 절망적인 의미를 띠며 나를 괴롭혔다. 일반적으로 언어에 부여하는 교환과 소통의 기능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그의 사랑이 그녀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나에 대한 것인가 그 한 가지만을 의미하는 기능으로 대체되었다. 
 
어떤 일은 반드시 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지체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즉시 그 일을 행하는 것. 광기와 고통의 상태를 특징짓는 이 긴급의 법칙, 나는 끊임없이 그것을 겪고 있었다. 막 발견해내서 문장으로 다듬어놓은 진실을 휘둘러 그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다음번 전화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마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진실이 진실이기를 그쳐버릴 수도 있다는 듯이. 동시에 그것은 전화 한 통, 편지 한 통, 함께 찍은 사진의 반송을 통해 고통을 털어버리려는, 결정적으로 "자기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그 고통을 부려놓으려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늘 마음 깊은 곳에는, 그 시도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욕망, 이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그 고통을 간직하려는 욕망. 그 모든 행위의 진정한 궁극적인 목표는 그가 반응하게 만듦으로써 고통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니까.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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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ohmy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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