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 이디스 워튼
모든 게 지긋지긋해! 그녀가 중얼거렸다.
현대 도시에서 삶과 살을 이어주는 모든 시설과 동떨어져 있었다. 상점도, 극장도, 강연장이나 상가 지역도 없었다. 다만 있는 것이라고는 도로 사정이 좋으면 두 주에 한 번씩 문을 여는 교회와 지난 이십 년 동안 새 책이라고는 한 권도 구입한 적이 없으며 낡은 책들마저 눅눅한 선반 위에서 조용히 썩어 가는 도서관뿐이었다.
모든 게 지긋지긋해! 채리티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노스도어 사람들은 '산'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내놓고 비난하기보다 억양으로 불만을 표시하였다. (억양으로 - 라는 말이 너무 귀엽네)
저기 저 언덕 꼭대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말이에요. (하니)의 말에 채리티는 전율을 느꼈다. 그 말이 그녀의 반항과 도전의 실마리가 되는 것 같았다.
밝은 햇살과 아름다운 아침에 취한 나머지 불행의 마지막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사랑이 핏속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데 어디에서 태어났건, 누구의 자식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채리티의 가슴이 쿵쿵 뛰다가 가만히 멈췄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루시어스 하니가 있었다. 그녀의 영혼이 슬픔의 바다에서 나뒹구는 동안 그 사람은 조용히 화판 앞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능란하고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의 두 손을 보자 비로소 채리티는 꿈에서 깨어났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그런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 장본인 사이에 상당한 불균형이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이 만들었건 하나님이 내렸건 어떤 금기에 대한 공포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순간 자신이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일이 언제나 그렇게 떠들석하게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전반적으로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 같지도 않았다. / 마을 사람들이 아는, 더 나쁘게 끝난 부끄럽고 비참하고 아직 죄를 고백하지도 않은 다른 사건들이 있었다. 위선이라는 똑같은 갑갑한 환경에서 눈에 띄는 별다른 변화도 없이 쓸쓸하게 살아가는 다른 삶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채리티를 가로막는 것은 이런 이유들이 아니었다. 전날부터 채리티는 만약 하니가 두 팔로 안아 준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입술과 입술이 하나로 녹아들고 긴불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불꽃처럼 활활 태울 것이다. 다만 이 감정에는 다른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이상야릇한 자부심, 그의 연민이 가슴에 불러일으킨 갑작스러운 부드러움 말이다. 어쩌다 젊음이 몸속에서 활활 불타오를 때면 채리티는 다른 아가씨들처럼 어스름한 황혼 녘 은밀히 사내들의 애무에 굴복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러나 하니에게 자신의 가치를 그렇게 떨어트릴 수 없었다. 채리티는 왜 그가 이 마을을 떠나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떠난다면 마음속에 품고 갈 자신의 이미지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그녀를 원한다면 그가 직접 찾아와야 할 것이다.
채리티는 불행이라는 커다란 먹구름을 타고 삶 위로 높이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구름 밑에는 일상적인 현실이 우주의 작은 티끌만큼 작아져 있었다.
그가 잘못을 범했던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채리티에게 그는 다만 노스도머처럼 피할 수 없지만 흥미롭지 않은 혹독한 현실이거나, 운명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여러 조건들 중 하나로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채리티는 오직 자신과의 관계에서만 그를 바라보았다. 두 번 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리라고 본능적으로 결론을 짓는 것 말고 그의 감정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저 언덕배기처럼 아주 오래되었고 대낮처럼 명약관화해. 만약 그 친구가 너를 원했다면 즉시 그렇다고 말했을 거란 사실 말이야. - 로열
그가 호소하는 것들이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와닿지 않았고, 오직 그에게 상처를 주고 부끄럽게 할 말만 떠올랐다. 그러나 점점 커지는 피로감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채리티는 예전 삶이 점점 옥죄어 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가 공상에 잠겨 마음속에 그리는 새로운 삶에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리프 하이엇의 진흙 묻은 장화가 하얀 찔레꽃을 짓밟던 장면이 갑자기 머리를 스쳤다. 지금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뭔가 속절없고 갸날픈 것이 채리티 가슴에 피어났고, 그녀는 옆에 서서 그것이 땅에 짓밟히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니새끼의 말)
당신은 내게 너무 친절히 대해 주었어요. 그래서 말하고 싶은 건, 아가씨가 좀 더 행복하고 좀 덜 외롭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틀림없이 아가씨도 점점 사정이 나아지겠죠.
노스도머에서는 사정이 달라지지 않아요. 그저 익숙해질 따름이죠.
소문이 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독립심을 내세우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말을 많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는 이제 그들만의 은밀한 언어가 생길 만큼 다채로웠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채리티에게 더위는 오히려 자극제였다. 가슴에 불타오르는 것과 똑같은 빛이 온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채리티는 반항심이 이는 순간에 늘 그러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난 저 '산'으로 갈테야... 내 가족들한테 갈 거란 말이야."
(하니새끼의 말)
"내가 채리티를 그냥 보낼 것 같아? 내가 당신 마음을 이해 못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의 모든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충동은 차츰 그의 의지를 숙명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그가 인격적으로 더 훌륭하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 오히려 그녀 자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 다만 그 나머지 삶이 그들의 열정이라는 중심적인 영광 주위에 감도는 희뿌연 후광에 지나지 않게 되어서였다.
채리티 로열은 발바닥부터 헝클어진 머리카락 꼭대기까지 그에 대해 정말로 잘 아는 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의 달라지는 눈빛을 알고, 목소리의 억양을 알고,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에 대해 알 만한 것은 모두 알고 있었따. 어린아이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는 방 안의 벽에 대해 알고 있듯이 채리티는 그 모든 것을 자세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미처 짐작하거나 알지 못하는 이 사실이 채리티의 삶을 특별하고 침범할 수 없는 무엇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비밀이 안전하게 지켜지는 이상 아무것도 그녀를 상처 주거나 괴롭힐 힘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처음에 하니의 애정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그 애정의 일부라고 할 언어였다. 늘 사랑이란 혼란스럽고 비밀스러운 무엇이라고 생각해 온 채리티에게 하니는 사랑을 여름 공기처럼 밝고 싱그러운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연인의 포옹이라는 부서지기 쉬운 은막 뒤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의 삶이 수수께끼처럼 숨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며 -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며 - 그의 의견, 그의 편견, 그의 원칙, 모든 사람의 삶이 그물처럼 뒤 얽혀 있기 마련인 영향과 이해관계 그리고 야심 말이다.
(하니를 만난 순간부터 '결혼'을 생각해 본적은 없는 채리티)
만약 미래를 생각했다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강이 너무 깊고, 두 사람의 열정이 그 강에 가로질러 놓은 다리는 무지개만큼이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채리티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앞일을 내다보지 않았다. 너무 풍요로운 하루하루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지금 그녀는 처음으로 모든 게 달라질 것이며 자신도 하니에게 다른 존재가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대신 그녀는 다른 사람과 비교될 테고, 그는 그녀가 모르는 일들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채리티는 너무 자만하여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은 한풀 꺾였다.
(하니가 결혼이란 말을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음)
비록 그에게 자신을 묶어 놓는 마법을 떨칠 힘은 없었지만 그녀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피할 수 없는 어떤 운명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지금 곧장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고, 자신의 비밀을 말로 적어야만 안심이 되고 무사하리라는 미신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아이는 그녀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짐이면서 두 발로 설 수 있도록 잡아 주는 손과 같았다. 채리티는 일어나 계속 가야 한다고 혼잣말처럼 말했다.